•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의 하나. 자는 선여(善汝), 호는 노은(魯隱).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稇)의 후예로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인수(金仁壽)의 손자이다. 타고난 바탕이 탁월하고 총명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또 부모 봉양의 예(禮)를 극진히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노산(魯山) 아래에 집을 짓고 주자서(朱子書)를 모두 암송하였다. 평소 그가 지켜 온 학문적 태도는 실천을 주로 한 것으로 언제나 “사람의 자식 된 도리는 효(孝)에 더한 것이 없고, 신하된 도리는 경(敬)에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송준길(宋竣吉)은 그의 깊은 학문과 높은 뜻을 칭송하여 ‘月明魯山, 風淸石溪’(노산에 뜬 밝은 달, 석계에 부는 맑은 바람)라 하였고, 조정에 천거하여 주부(主簿) 벼슬이 제수되었고, 다시 지평(持平), 공조참의(工曹參議), 좌윤(左尹) 등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11대 진안군수. 1959. 1. 12 부임하여 1960. 1. 9까지 1년간 재임하였다.
  • 남학 또는 광화교[금강불교, 오방불교, 처사교 등의 이칭이 있다]의 제4세 교주. 이운규(李雲圭)의 남학을 계승하여, 유·불·선 삼도(三道) 중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의 장점을 취한 신흥종교인 광화교를 창시하였다. 초명이 치인(致寅), 개명(改名)은 광제(廣濟)이며, 광화(光華)는 호이다. 1855년에 이서면 장등리(주천면 대불리 장등마을)에서 출생하였다. 편모슬하에 가세가 곤궁하여 어릴 때부터 대불리, 무주, 연산, 전주, 논산 등지로 옮기다니며 살다가 26세 되던 1881년 고산 선야동(仙冶洞)에 거주하면서 수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학심이 강했지만 집안이 곤궁하였으므로 틈틈이 어깨 너머로나마 상용적인 경술(經術이라도 배우려 노력하였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동경하던 ‘도술’ 공부라도 해보려는 생각에 수시로 명산대천으로 도인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20세 때 진산 태고사(대둔산 동쪽기슭에 있음)에서 이용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일설에는 “13세에 도인이 찾아왔다”고도 한다]. 이용래는 세종의 15세손으로 그 아버지가 남학을 창시한 이운규(호는 蓮潭)이다. 이용래는 그 아버지 이운규에게서 수업하여 동생 이일수(李一守)와 김광화에게 전교하였다. 광화교의 「연원론(淵源論)」에는 이운규를 1세 교주로 하고 2세는 이용래, 3세는 이일수, 4세를 김광화로 남학의 법통을 전하고 있다. 이용래는 김광화에게 13자의 구령주(九救?靈呪)를 주면서 수련정진할 것을 명했다. 김광화의 행장 중에는 수도 중에 겪었다는 신비로운 일화가 많이 있다. 김광화가 26세 때(1881) 스승 이용래가 홀연 자취를 감추고 이용래의 아우 이일수가 찾아와서 「이용래가 김광화에게 주는 글」 한 편을 전하였다. 그 때부터 이일수의 제자가 된다. 이 때는 연산 인내에서 이운규에게 도를 받은 김항(金恒, 호는 一夫)이 도각의 기운이 열리고 제자들이 따르게 되어 교단 성립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 때다. 김광화도 이일수를 맞이하면서부터는 점차 도체가 밝혀지고 선야동 수도장을 찾아오는 교도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888년(33세)에는 주천면 대불리에 도장을 설치하고 ‘오방불교(五方佛敎)’라는 명칭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때 오방불교의 교주는 이일수였지만 교단 운영의 실제적인 권한은 김광화에게 있었다. 34세 때(1889년) 대둔산 석천암(石泉庵)으로 옮겨 수도할 때는 병자를 치료하는 신통력을 발휘하였고 35세 때(1890년)에는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추었다 한다. [동학과의 관계 및 거사 모의에 관하여] 당시 남학(南學)은 동학(東學)과 대치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동학에 대하여 일종의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발발을 계기로 노정(露呈)되었다. 동학도들이 보국안민·후천개벽의 기치를 들고 승승장구 충청도까지 진격하는 것을 본 남학교단에서는 “우리도 주장하는 바가 후천개벽으로 동학과 같으며 또 동학과 대등한 지위를 찾기 위해서도 이에 협찬하여 총궐기하자”고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학운동과 구별하는 뜻에서 노랑저고리를 입고 오방기 아래 출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남학운동의 기미를 안 관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출동 직전에 해산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남학의 문헌에 의하면, 이 때 이일수와 김광화 등 수뇌부는 “동학운동은 상성(常性)을 잃은 난동”이라고 지적, “난세를 당해서는 오직 도덕을 닦고 안심하는 것만이 활로를 얻는 길”이라고 하면서 남학교도의 거사를 극구 제지하였다고 한다. 비록 김광화 등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지만 남학의 교리·신행이 동학과 유사한 점이 있는 데다가 거사 모의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관(官)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1895(을미)년 봄에 관군은 교주 이일수와 김광화 및 교도 6명을 체포하여 4월 16일 전주 서문 밖에서 처형하였다. 광화교의 문헌에 의하면 “남학의 이 「을미수난」은 비록 교주 등이 횡액을 당했지만 그들의 처신은 수만의 교인의 생명을 보존케 한 은혜로운 순교였다”고 평가한다. 김광화는 체포되기 전날 밤 신도 4~5인을 불러 자신이 다음날 체포될 것을 예언하고 교인들을 피신시키도록 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체포에 응하였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나 형장에서도 조금도 변색하는 일 없이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고 한다. 김광화에 관계된 자료는
  • 1880~1944.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우국지사. 자는 중경(重敬), 호는 우당(愚堂).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김태희(金泰熙)의 아들이다. 마령면 연장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스승 송병선이 자결한 후 1906년 최제학의 창의에 가담하였다. 1907년 충훈부에서 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송병선·최익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기회와 함께 현현계(賢賢契)를 조직하였다. 1925년 현현계를 회덕계(懷德契)로 바꾸고 고종의 위판을 마이산단(뒤에 대한이산묘로 개칭)으로 옮겼다. 1926년에는 이도복(李道復)을 이산정사로 초치하였다. 그 해 봄 순종이 승하하자 이도복·오상필과 함께 주필대 아래에 석단을 쌓고 순종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후 망국의 분함을 이기지 못해 음독 자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 세워진 유적비가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 1863~1965. 주천면 주양리에서 출생. 자는 우서(禹瑞), 호는 성재(誠齋). 공안공(恭安公) 김겸광(金謙光)의 후손으로 김중정의 9세손이다. 김태현(金泰鉉)의 동생으로 문장과 학문에서 난형난제였다. 너그러움이 의표로 드러났으며 명리와 멀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향교, 1925)
  • 1799~1873. 호는 눌와(訥窩), 자는 달경(達敬).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금산에서 민병을 일으켜 탐관오리를 쫓아내고 재물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수하여 국문을 받았으나 풀려났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884~1931. 우국지사.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청사(晴沙).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다. 증조는 사성(思聲), 조부는 석기(奭基), 부친은 종협(鐘協)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910년부터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영상(全永祥)·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군중을 모아 마령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된 전영상을 마령면 강정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구출하였다. 후에 회덕전(懷德殿)과 이산사(駬山祠)를 창건하고 친친계(親親契)를 조직하였으며, 군지(郡誌)와 도지(道誌)의 발행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도복(李道復)이 만사(輓詞)를 지어 애도하였고, 사위 이상녕(李湘寧)이 묘표를 지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881년 4월에 부임하여 1884년 2월 영천군수로 전임하였다.
  • 1905~1977.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시인·교육자. 호는 동은(東隱)·백당거사(白堂居士)·침월장주인(枕月莊主人). 진안면 군하리에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시 창작에 일념하여 일제강점기에 신문·잡지 등에 시를 발표하였고, 향리에서 시회를 열거나 백일장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진안면 부면장을 거쳐 진안중학원을 설립하고 국사 교습 및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근명야학원을 설립하여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수분(守分)·안빈낙도(安貧樂道)·청렴(淸廉)을 생활신조로 삼아 오직 시와 서예에 심취하였다. 한시 1990수가 등재되어 있는
  • 김규현(1879.09.21.~1950.02.10.)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朱川면 주양리 476 출신, 우국지사. 주천면의 청년 김영필(金永弼) 등이 1919년 4월부터 『대한민보』·『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관계의 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주천면 경찰주재소에 검속되어 고문을 당하고 증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주천면 서기로 있던 김규현은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으려 한 것인데 이것이 무슨 죄냐”고 하면서 주재소의 일본인 경찰관 등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의협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일로 김규현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1운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대한민국공훈록
  • 진안현감. 1829년 12월에 부임하여 1833년 5월 천안으로 전임하였다.
  • 1847~1910. 전라북도 익산 출생. 항일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의 하나.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 1866년 병인양요 때 ‘척외(斥外)’를 주장하며 의거하였고 이듬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며 사직하고 낙향해 있다가 1910년 국권 피탈에 통분하며 우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45년 7월에 부임하여 1847년 1월 천안으로 이임하였다.
  • 조선 전기 진안에서 활동한 학자. 자는 미숙(微淑), 호는 유산처사(乳山處士). 평장사(平章事) 민의공(敏懿公) 김사이(金思頤)의 손자이고 병조판서 김만서(金晩緖)의 아들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 때 학행으로 추천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만년에는 진안의 동쪽 유산(乳山)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행장이 있다.《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진안 향토문화 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