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 또는 광화교[금강불교, 오방불교, 처사교 등의 이칭이 있다]의 제4세 교주. 이운규(李雲圭)의 남학을 계승하여, 유·불·선 삼도(三道) 중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의 장점을 취한 신흥종교인 광화교를 창시하였다. 초명이 치인(致寅), 개명(改名)은 광제(廣濟)이며, 광화(光華)는 호이다. 1855년에 이서면 장등리(주천면 대불리 장등마을)에서 출생하였다. 편모슬하에 가세가 곤궁하여 어릴 때부터 대불리, 무주, 연산, 전주, 논산 등지로 옮기다니며 살다가 26세 되던 1881년 고산 선야동(仙冶洞)에 거주하면서 수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향학심이 강했지만 집안이 곤궁하였으므로 틈틈이 어깨 너머로나마 상용적인 경술(經術이라도 배우려 노력하였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동경하던 ‘도술’ 공부라도 해보려는 생각에 수시로 명산대천으로 도인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20세 때 진산 태고사(대둔산 동쪽기슭에 있음)에서 이용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일설에는 “13세에 도인이 찾아왔다”고도 한다]. 이용래는 세종의 15세손으로 그 아버지가 남학을 창시한 이운규(호는 蓮潭)이다. 이용래는 그 아버지 이운규에게서 수업하여 동생 이일수(李一守)와 김광화에게 전교하였다. 광화교의 「연원론(淵源論)」에는 이운규를 1세 교주로 하고 2세는 이용래, 3세는 이일수, 4세를 김광화로 남학의 법통을 전하고 있다. 이용래는 김광화에게 13자의 구령주(九救?靈呪)를 주면서 수련정진할 것을 명했다. 김광화의 행장 중에는 수도 중에 겪었다는 신비로운 일화가 많이 있다. 김광화가 26세 때(1881) 스승 이용래가 홀연 자취를 감추고 이용래의 아우 이일수가 찾아와서 「이용래가 김광화에게 주는 글」 한 편을 전하였다. 그 때부터 이일수의 제자가 된다. 이 때는 연산 인내에서 이운규에게 도를 받은 김항(金恒, 호는 一夫)이 도각의 기운이 열리고 제자들이 따르게 되어 교단 성립의 기초를 닦기 시작한 때다. 김광화도 이일수를 맞이하면서부터는 점차 도체가 밝혀지고 선야동 수도장을 찾아오는 교도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888년(33세)에는 주천면 대불리에 도장을 설치하고 ‘오방불교(五方佛敎)’라는 명칭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때 오방불교의 교주는 이일수였지만 교단 운영의 실제적인 권한은 김광화에게 있었다. 34세 때(1889년) 대둔산 석천암(石泉庵)으로 옮겨 수도할 때는 병자를 치료하는 신통력을 발휘하였고 35세 때(1890년)에는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추었다 한다. [동학과의 관계 및 거사 모의에 관하여] 당시 남학(南學)은 동학(東學)과 대치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동학에 대하여 일종의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발발을 계기로 노정(露呈)되었다. 동학도들이 보국안민·후천개벽의 기치를 들고 승승장구 충청도까지 진격하는 것을 본 남학교단에서는 “우리도 주장하는 바가 후천개벽으로 동학과 같으며 또 동학과 대등한 지위를 찾기 위해서도 이에 협찬하여 총궐기하자”고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학운동과 구별하는 뜻에서 노랑저고리를 입고 오방기 아래 출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남학운동의 기미를 안 관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출동 직전에 해산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남학의 문헌에 의하면, 이 때 이일수와 김광화 등 수뇌부는 “동학운동은 상성(常性)을 잃은 난동”이라고 지적, “난세를 당해서는 오직 도덕을 닦고 안심하는 것만이 활로를 얻는 길”이라고 하면서 남학교도의 거사를 극구 제지하였다고 한다. 비록 김광화 등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지만 남학의 교리·신행이 동학과 유사한 점이 있는 데다가 거사 모의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관(官)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1895(을미)년 봄에 관군은 교주 이일수와 김광화 및 교도 6명을 체포하여 4월 16일 전주 서문 밖에서 처형하였다. 광화교의 문헌에 의하면 “남학의 이 「을미수난」은 비록 교주 등이 횡액을 당했지만 그들의 처신은 수만의 교인의 생명을 보존케 한 은혜로운 순교였다”고 평가한다. 김광화는 체포되기 전날 밤 신도 4~5인을 불러 자신이 다음날 체포될 것을 예언하고 교인들을 피신시키도록 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체포에 응하였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나 형장에서도 조금도 변색하는 일 없이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고 한다. 김광화에 관계된 자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