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1944.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우국지사. 자는 중경(重敬), 호는 우당(愚堂).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며 김태희(金泰熙)의 아들이다. 마령면 연장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스승 송병선이 자결한 후 1906년 최제학의 창의에 가담하였다. 1907년 충훈부에서 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송병선·최익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기회와 함께 현현계(賢賢契)를 조직하였다. 1925년 현현계를 회덕계(懷德契)로 바꾸고 고종의 위판을 마이산단(뒤에 대한이산묘로 개칭)으로 옮겼다. 1926년에는 이도복(李道復)을 이산정사로 초치하였다. 그 해 봄 순종이 승하하자 이도복·오상필과 함께 주필대 아래에 석단을 쌓고 순종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후 망국의 분함을 이기지 못해 음독 자결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 세워진 유적비가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