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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49. 자는 화일(華日), 호는 미능(未能). 흥안군(興安君)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의 후손이다. 이광범(李光範)의 아들이나 출계하여 이상범(李尙範)의 뒤를 이었다. 생가의 친형 이도문(李道文)과는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합심하여 조상 섬기는 일에 전력하였고, ‘채헌유고(債軒遺稿)’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정귀영이 묘표를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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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55년 6월에 부임하여 1856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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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19. 자는 진화(振華), 호는 가석(可石). 이명성(李明誠)의 후손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호년(李浩秊)의 아들이다. 정종엽(←鄭鍾燁)과 어려서부터 사이좋게 지냈다. 안병태(安秉台)가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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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9. 10. 8 순창군수에서 진안으로 전임, 1921. 10. 12 임실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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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1910. 경상북도 예안(현 안동시) 출신. 한말의 학자.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1866년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유서를 써놓고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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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직향(直鄕), 호는 근재(謹齋). 이달손(李達孫)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유항(李惟恒)이다. 재기가 웅대하고 사예(射藝)에 능하여 무과에 합격하고, 선전관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이상진(李尙眞)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제수받았다. 뒤에 고원군수와 하동군수를 지내던 중 오두인(吳斗寅),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 등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1694년에 복관되고 1698년에 다시 삭주 도호부사가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전북원우록』,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http://www.ency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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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58년 1월에 부임하여1861년 6월 대흥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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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90년 9월에 부임하여 1793년 6월 강진현령으로 전임하였다. 호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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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08년에 부임하여 1611년 병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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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144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조부는 이운증(李堣曾)이며, 아버지는 이엽(李曄)이다. 1396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 사간원우헌납, 장령, 사인, 집의, 좌사간대부, 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과 충절사, 화순군 능주면 충현사,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뒤 충절사(忠節祠)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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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 전공판서 정경공(貞敬公) 이엽(李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우 이명덕과 함께 이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정몽주와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적성감무를 거쳐 감찰어사 지제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개성 만월대 아래에서 정몽주와 작별한 후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 산중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기록은 고려조 충렬록에 기재되어 있다.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뒤 충절사(忠節祠)에 배향되어 있다.《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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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9월 처가 죽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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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952. 자는 경하(景夏), 호는 국사(菊史). 직제학 이교(李校)의 후손이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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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홍언(洪彦), 호는 국포(菊圃). 직제학 이교(李校)의 후손이며, 이병연(李柄淵)의 동생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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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1876. 자는 광삼(光三). 문의공(文義公) 언충(彦冲)의 후손이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