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는 치중(致仲),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해서 입당(笠堂)이 별호가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師事)하고 그의 항일투쟁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이 옥사하고 나라도 망하자 운장산에 칩거하여 나오지 않았으며, “태양을 우러르기 민망하다” 하여 늘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만덕산 아래로 이거하여 후진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1996년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에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 1888~1950. 자는 명오(明五), 호는 횡계(橫溪). 판서 이귀산(李貴山)의 후손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이영구(李永九)의 아들이다. 성품이 본래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적극 도와주었다. 정귀영(鄭貴泳)이 묘표를 찬하였고,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횡계당기(橫溪堂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62~1946호는 정은(靜隱). 정천면 봉학리에서 이기현(李基鉉)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주천면으로 이사하였다.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이상래(李祥來)의 부친이다.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5세 때 김태현(金泰鉉)에게 사사하였다. 주천면의 사립 화동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평생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 정은집(靜隱集)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5권이 있으며, 서하집(西荷集) 11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정은집을 집필하던 명덕정(일명 하정각)이 정천면 봉학리 상조림에 남아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향교, 1925)
  • 용담현령. 1878월에 부임하여 1881년 재임중 사망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진안현감.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815년 6월에 부임하여 1818년 6월 강등되어 이임하였다.
  • 1847~1907. 자는 의순(儀舜), 호는 괴원당(愧遠堂).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冲)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900~1932.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의사(義士).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형 이범태(李範泰)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도쿄’와 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면서 노동 등의 막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1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큰일을 수행할 것을 다짐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김구(金九)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키고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 왕 폭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 동생 공근(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후 곧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일본왕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도쿄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관병식을 할 때,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 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현감. 1619년 8월에 부임하여 1622년 8월에 이임하였다.
  • 1860~? 한말의 동학운동가. 백운면 오정리 출신이다. 자(字)는 성필(聖弼). 보명(譜名)은 기풍(起豊)이며, 사명(士明)은 동학교단에서 내린 이름이다. 효녕대군 28세손 충경공파로 선대는 남원 둔덕에서 살다가 남원 아영면(당시는 운봉) 두락리에 자리를 잡았으나 언제인가 백운면 오정리로 이사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했다고 한다. 당시 오정리에 은거해 있던 전봉준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동참, 남원지역 접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김개남의 남원 입성을 도왔으며, 10월 김개남의 북상 이후에는 남원성에 남아 박봉양(朴鳳陽) 민병과 싸웠으며, 진안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동학군이 패퇴하여 전봉준·김개남 등 영수급들이 차례로 처형되면서 이사명도 임실 오수면에서 잡혔으나,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부인 전주 최씨는 어린 아들 강엽(康燁, 당시 4살)과 딸들을 데리고 인근 백운면 분토동에 피신하였고, 자식들이 성장하자 마령면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용담현령. 1776년 1월에 부임하여 1779년 6월 임천군수로 영전하였다. 공조좌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870~1917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순오(舜五), 호는 부재(溥齋).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헐버트(Hulbert, H. B)와 친교를 맺어 영어와 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07년 6월경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614~1690. 조선 중기 진안에서 활동한 문신·학자.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시호는 충정(忠貞). 증조는 부윤 이정란(李廷鸞), 조부는 이종길(李遵吉), 부친은 참봉 이영선(李榮先)이다. 자손으로는 이우하(李宇夏)가 있다. 164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2년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국가의 제반 사항을 논리정연하게 논평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1654년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사를 여러 차례 직언하였다. 헌종 때에는 이조참판, 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당시 영남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아 정무가 매우 번거로웠다. 감사로 부임하여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 판결을 신속하고 조리 있게 처결해 송옥(訟獄)을 종식시켰다. 우수한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칭송이 도내에 자자했다고 한다. 1678년에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1680년 판중추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1689년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간언하다가 종성·북청·철원 등지로 귀양을 갔다. 이후 소결(疏決)로 용서되어 부여의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진안지』에는 “진안읍 연장리에 살았고, 훈련대장 전동흘(全東屹)과 친구였다”고 전한다.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선출되었다. 전주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우고, 1708년 북청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1694년에 한계서원에 추가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명재유고(明齋遺稿)』,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국역 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5)
  • 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용담현령. 1768년 7월에 부임하여 1771년 5월 사직하였다. 사헌부감찰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