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 한말의 동학운동가. 백운면 오정리 출신이다. 자(字)는 성필(聖弼). 보명(譜名)은 기풍(起豊)이며, 사명(士明)은 동학교단에서 내린 이름이다. 효녕대군 28세손 충경공파로 선대는 남원 둔덕에서 살다가 남원 아영면(당시는 운봉) 두락리에 자리를 잡았으나 언제인가 백운면 오정리로 이사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했다고 한다. 당시 오정리에 은거해 있던 전봉준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동참, 남원지역 접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김개남의 남원 입성을 도왔으며, 10월 김개남의 북상 이후에는 남원성에 남아 박봉양(朴鳳陽) 민병과 싸웠으며, 진안의 접주로 활약하였다. 동학군이 패퇴하여 전봉준·김개남 등 영수급들이 차례로 처형되면서 이사명도 임실 오수면에서 잡혔으나,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부인 전주 최씨는 어린 아들 강엽(康燁, 당시 4살)과 딸들을 데리고 인근 백운면 분토동에 피신하였고, 자식들이 성장하자 마령면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