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용(李錫庸)
운영자 23-12-18 18:44 600 hit
1878∼1914.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1907년 9월 진안 마이산에서 거의하여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진안지역을 무대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할아버지는 승문박사(承文博士) 이태환(李泰煥)이고 아버지는 이봉선(李鳳善)이다.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1906년 임실, 장수, 진안, 남원, 함양, 순창,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 정부와 세계열강에게 격문, 통고문, 규탄문,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 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음력 8월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의병의 길로 나섰다. 같은 고향의 전기홍(全海山)이 서신을 보내 함께 거의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 때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기홍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 구축이 필요함을 절감,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지들과 함께 임실 상이암(上耳庵)과 황사현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등 준비하는 가운데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의병창의동맹’을 결성하여 선봉, 중군, 후군, 참모, 총지휘, 연락, 도로부장, 보급, 운량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기홍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여운서(呂雲瑞), 김공실(金公實) 등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 기슭의 용암(龍巖) 위에서 설단제천(設壇祭天)하며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외쳤다.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고 했으며 자신은 ‘호남창의대장’이라 하였다. 이들은 대오를 편성한 후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물취급소, 일본어 통역의 가옥 등을 불사르고 통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진회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하였다. 용담에서 활동 중이던 김동신 의병부대와 합진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잘 진행되지 않았고 와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임실, 진안, 장수, 운봉, 남원, 곡성, 정읍 등 주로 전라도 동부 산간 지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구례로 이동해 온 고광순 의병부대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 음력 3월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1912년 겨울 국가를 되찾기 위해 비밀결사를 결성, 중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정동석을 찾아갔다가 성수면 삼봉리에서 밀고 당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살인, 방화, 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4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전북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홍영기 『한말 후기 의병』(독립기념관 한사학』2,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