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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1870.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순경(舜卿), 호는 석정(石亭). 증조는 이규성(李揆聖), 조부는 이구연(李龜蓮), 부친은 이수삼(李受森)이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고종 대에 행의(行義)로 사림의 천거를 받았다. 정상범(鄭相範)이 전라도를 순행할 때 특제(特題)로 내린 “백리수풍망려필식(百里樹風望閭必式)” 여덟 자로 지은 글을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암송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라 병사(兵使) 이관연(李觀淵)이 수직(壽職)으로 천거하여 숭정대부 동지충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최병심(崔秉心)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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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동국여지승람』 <진안현>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고 실려 있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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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9년 6월에 부임하여 1562년 6월에 이임하였다. “재임한지 200년이 지났으나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진안지』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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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1695. 조선 중기 진안현감을 지낸 문신. 자는 대숙(大叔). 임영대군의 7대손이며 판서 이응시(李應蓍)의 아들이다. 조부와 부친의 공덕으로 음관(蔭官)에 천거되어 진안현감이 되어 1676년에 부임하였다. 1681년 9월에 암행어사로 내려온 오도일(吳道一)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뽑혀 관직이 특승되었다. “향리[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평안했다”고 『진안지』에 전한다. 이어 남원부사로 전임하여서는 가뭄이 들면 농사를 못 짓는 오수방에 보를 막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이 감복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1689년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충홍도[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1691년 지방행정관으로서 행한 선정을 인정받아 호조참판으로 승직되었고 1692년에 공조판서, 169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었다. 1693년 국방 대책으로 통진(通津)[현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文殊山)에 성을 쌓았다. 1694년 지의금부사가 되어 옥사를 공정히 다루었으며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보복적인 탄핵을 받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賜死)되었다. 1908년 3월 누명이 벗겨져 복권되었다. 《참고문헌》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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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05년 7월에 부임하여 1810년 2월 동부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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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16년에 부임하여 1621년 임기만료. 재임중 과거에 붙었다. 관아를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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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겸직이었다. 1646년 6월에 부임하여 1647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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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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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진안군수. 1954. 4. 8 부임하여 1955. 5. 4까지 1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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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10.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한말의 의사.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09년 1월 통감 이토[伊藤博文]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이 이토를 사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죽이기로 하고,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각각 담당하여 암살하기로 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鐘峴) 천주교회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비수로 세 번 찔러 쓰러뜨렸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붙잡혔다.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는 방청석을 향하여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는 연설을 하였고, 일본인 재판장에게는 “의행을 행한 것”이라고 준열히 나무랐다. 사형이 확정되자 “나의 생명은 빼앗기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2001년 ‘이재명의사 기념사업회’가 진안읍 군하리 영사재 앞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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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25년 3월에 부임하여 1728년 6월 김제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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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金山君)의 후손이다. 황하청(黃河晴)이 기술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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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36년 3월에 부임하여 1636년 6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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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진안군수. 1970. 3. 3 부임하여 1971. 8. 21까지 1년 6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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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23년 4월에 부임하여 1628년 1월에 이임하였다. 소탈하면서 백성들과 가까웠다고 『鎭安誌』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