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1910.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한말의 의사.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09년 1월 통감 이토[伊藤博文]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이 이토를 사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죽이기로 하고,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각각 담당하여 암살하기로 하였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鐘峴) 천주교회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비수로 세 번 찔러 쓰러뜨렸다.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붙잡혔다.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는 방청석을 향하여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는 연설을 하였고, 일본인 재판장에게는 “의행을 행한 것”이라고 준열히 나무랐다. 사형이 확정되자 “나의 생명은 빼앗기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2001년 ‘이재명의사 기념사업회’가 진안읍 군하리 영사재 앞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