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현령. 1557년에 부임하여 1561년 파직되었다.
  • 진안군수. 1900년 11월에 부임하여 1900년 11월 하양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892년에 부임하여 1894년 4월 파직되었다.
  • 용담현령. 1818년 6월에 부임하여 1822년 6월 교하현령으로 영전하였다.
  • 용담현령. 1762년 1월에 부임하여 1762년 6월 상을 당하여 체임되었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 35대 진안군수. 1987. 3. 11 부임하여 1988. 6. 10까지 1년 4개월간 재임하였다.
  • 43대, 44대, 45대 진안군수이자, 초대 민선군수였다. 1995. 7. 1. 취임하여 2006. 6. 30까지 3기를 재임했다.
  • 진안현감. 1739년 9월에 부임하여 1740년 6월에 이임하였다.
  • 1649~1696. 조선 중기 진안지역에 살던 문신·유학자.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조부는 상주 목사를 지낸 임타(林㙐)이고 부친은 군수 임일유(林一儒)이다. 1665년 사마시에 장원하였고 1671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1679년 정언 부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1686년 이조정랑, 이조검상, 부제학,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에 대사간,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부제학으로 있을 때 병이 들어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뒤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이단상(李端相)·박세채(朴世采)의 문인으로 뜻이 크고 박식하였으며, 소성(小成)에 만족하지 않고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였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뒤에 송시열·송준길에게도 수학하여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창계집』 27권이 있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함평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임영기(1882~1910.03.25.)는 진안군 일서면 시동( 西面 矢洞, 지금 성수면 구신리) 출신이 다. 그는 1908년 1월 30일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가입하여, 3월 4일까지 장수, 임실 둥지에서 유격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음력 2월 6일 의병 15명과 함께 전북 장수군 방교리(防橋里)의 민가에 들어가 엽전 1관문(貫文)과 무명베 1필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14일에는 의병 24명과 함께 전북 임실군 아산면(阿山面) 보구리(保龜里) 민가에서 견포(絹布) 2필을 거두는 등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 전주지부(全州支部)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3월 25일 옥중 순국하였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13대 진안군수. 1960. 5. 24 부임하여 1960. 1. 21 까지 5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894년 6월에 부임하여 1897년에 이임하였다. 비석이 있다.
  • 용담현령. 1725년 8월에 부임하여 1726년 12월 파직되었다.
  • 5대 진안군수. 1950. 5. 6 부임하여 1950. 6. 25 까지 2개월간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