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6~1908.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1907년 9월 이석용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박갑쇠(朴甲釗)·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의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특히 진안군 석전리와 장수군 배룡리의 전투에서 뚜렷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군율(軍律)이 엄정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삭왜십죄(數倭十罪)’를 지어 일본의 잘못을 10개 조항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하였다. 1908년 일제의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이석용의 의병 부대가 해산되기 직전까지 격렬하게 항쟁하였으나 끝내 일본군과 격전 중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한편 이석용의 의병활동기록인 『정재선생 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에는 임종문이 참여한 의병 대열의 전투 장소와 일자 및 일진회원을 섬멸한 일, 왜인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한 전과 등이 기록되어 있다. 1968년에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정재선생 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 1860~1930. 자는 원일(元日), 호는 소림(小林). 조양군(兆陽君) 임세미(林世味)의 후손이다. 이도계(李道繼)가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용담현령. 1762년 7월에 부임하여 1764년 12월 상을 당하여 체임되었다.
  • 1대 진안군수. 1945. 12. 24 부임하여 1946. 7. 8 까지 7개월간 재임하였다.
  • 1690~1756.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호는 노암(老巖). 임타(林㙐)의 증손자이고 임만유(林晩儒)의 손자이다. 임윤(林潤)의 아들이며 임호진(林濠鎭)의 증조부이다. 상전면 용평리 평은마을에서 태어났다. 임타가 상전면 와은리에 내려와 은거하며 지은 만화정(萬花亭)이라는 정자에서 평생 학문과 시작(詩作)으로 살았다. 학문이 뛰어나 진안에서 일류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송성담(宋性潭, 이름은 煥基)도 임취업의 문집을 보고 “문장사율(文章詞律)은 임영(林泳)과 동등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노암문집(老巖文集)』5권, 『효행유고(孝行遺稿』5권 등이 있다. 시는 「과만화정구지(過萬花亭舊地)」가 전한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1593~1664. 조선 중기 진안지역에 거주한 문신. 자는 실지(實之), 호는 몽촌(夢村). 승지(承旨) 임붕(林鵬)의 증손으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임복(林復)의 손자이며 임협(林悏)의 아들이다. 임제(林悌)가 5촌 당숙이다. 어렸을 때에 권비(權鞞)에게 수학하였고 천성이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서 호남 제일의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161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금오랑 의금부도사(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다. 이후 태인 현감(泰仁縣監),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칠곡 부사(漆谷府使), 서산 군수(瑞山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 오위장(五衛將), 금산 현감(錦山縣監), 이천 부사(利川府使), 상주 목사(尙州牧使),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목민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임타는 벼슬에서 물러나 아들들과 더불어 정천면 조림촌에 우거하여 나주 임씨 용담 종중의 뿌리가 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
  • 용담현령. 1779년 1월에 부임하여 1781년 12월 금구현령으로 전임하였다. 공조정랑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1779~184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교육자. 자는 찬증(燦增), 호는 모와(慕窩). 임제(林悌)의 7대손이고 아버지는 임기원(林起遠)이다. 정천면 조림리에서 태어났다. 이 지방이 심산유곡으로 교육기관이 없었음을 한탄하여 1824년 4월 교육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흥학계(興學契)’를 조직하였다. 1836년 정천면 갈룡리에 ‘흥학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누구나 무료로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이후 10여 년 간 후진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들 임철한(林澈漢)이 흥학계를 더욱 확장시켜 지방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용담현령. 1806년 7월에 부임하여 1811년 7월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영산현령이었다가 본직으로 왔다.
  • 진안현감. 1856년 8월에 부임하여 1857년 7월 봉고파직되었다.
  • 용담군수. 1900년 이후 부임하였으나 부임연대와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진안군수. 1903년 5월에 부임하여 1905년 1월에 이임하였다.
  • 장진욱(1866.04.05.~1934.09.10.) 한말의 의병. 자는 화삼(華三)이고, 호는 호암(壺岩). 초휘(初諱)는 진규(鎭奎) 이며, 본관은 홍성(興城)으로 진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봄, 최익현의 의병단에 가입하고 최제학과 함께 가산을 처분하여 군량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순창에서 최익현이 의병군을 해산하고 일본 군경에 잡혀가자 울면서 최익현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일경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이른바 ‘호적령’을 공포하였으나 “한민족이 왜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입적을 거부하였다. 또 왜인이 태인의 ‘무성서원’의 토지를 강탈하자 앞장서 각지에 격문을 보내고 회수를 위해 투쟁하였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 때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그 후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남원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수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식음을 전폐하여 병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202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1841~1910. 전라북도 김제 출신.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그는 “불충과 불효한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며 단식하여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근대 진안 출신 효자. 별칭 장향풍. 효행(孝行)으로 1870년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고, 1873년에 정려(旌閭)가 내리었다. 정려는 백운면 반송리에 있다.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의 문화재』(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