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6~1799.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경지(敬之), 호는 학계(鶴溪). 대호군(大護軍) 전극례(全克醴)의 후손이며 효자 전성대(全聖大)의 아들이다. 유림의 거듭된 추천으로 이조(吏曹)에서 그의 효행을 『삼강록(三綱錄)』에 게재하였다. 진안군과 전라도에서 가상하다는 제사(題詞)가 있어 장례비로 쌀 2석을 내렸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
삼일만세운동의 선봉. →삼일운동과 진안.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1516(중종 11)~1592(선조 25),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호는 월암. 본관은 천안으로써 문평공 문식의 후손이며 사직 자양의 손자이다. 임 진년에 의거하였다. 추풍령까지 적을 추적하여 크게 습격 하고 쳐부수는 중에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숙종조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號浪庵 貫天安 文平文車式后 司直 自讓孫 壬辰擧義 追賊于秋風嶺 大擊破竟爲流矢所中 而卒 肅宗朝贈兵判 事載節義錄
진안향교지2009, 증보판 진안향교지2023
-
조선 전기 진안으로 낙향한 문무관인. 호는 낭헌(浪軒). 형조판서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증손으로 판중추부사 전사미(全思美)의 아들이다. 『진안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했을 뿐 아니라 도량이 넓고 문장이 장하여 당시의 재상 황희(黃喜)·허조(許稠) 등과도 사귀었다.” 세종 때에 정시에 올라 승문원 정자, 사헌부 정언, 호조참판,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쳐 호조판서 겸 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1455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마령면 강정리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스스로 ‘낭헌’이라 부르고 생륙신 남효온, 조여 등 절의파 사림들과 교유하며 일생을 마쳤다. 당시 사림들은 전극례의 절개를 중히 여기어 고려 칠십이현의 충절에 비유하였다. 후손 전광로(全光魯)가 찬하고 전한풍(全翰豊)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박기양(朴箕陽), 판서 민철훈(閔哲勳), 참판 김재순(金在珣), 참판 이용구(李龍九), 승지 이범석(李範錫), 승지 서광필(徐光弼) 등의 이름이 적힌 ‘도학포장’이 있으며, 이선호(李璇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유양 조중목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75~1951.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자는 덕필(德弼), 호는 요은(蓼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으로 증조는 전경백(全慶伯)이고 조부는 전만업(全萬業)이며 부친은 전병화(全炳化)이다. 백운면 오정리에 거주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사촌 동생인 전기홍(全基泓)과 의기투합하였는데, 전기홍이 항일(抗日)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의병 활동에 필요한 비용과 기회를 마련하는 등 필생의 심력을 쏟아 부었다. 의병 항쟁을 벌이던 전기홍이 죽어 자식이 없게 되자 아들 전종하(全鍾廈)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고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집안에 보관하였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79∼1910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개항기 의병. 초명은 종기(鍾棄), 자는 수용(垂鏞), 호는 해산(海山). 아버지는 전병국(全炳國)이다. 임실에서 출생. 9세에 이한룡(李漢龍)의 문하에 입문해 24세까지 수학하였다. 특히 『춘추좌씨전』에 심취하여 정치에 관심과 안목을 갖게 되었다. 1907년에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전기홍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 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이 전기홍을 7월 25일에 대동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영암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몇 명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의진의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많았다. 그러나 1909년에 일제가 ‘의병대 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마지막 접전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1월 17일에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 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에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에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러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전기홍은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 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전해산 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중 2책이 전해지는데 이는 종질이자 양자인 전종하(全鍾廈)가 지녀온 것이다. 내용은 무신년편(1908)과 기유년편(1909)으로 나누어져 있어 1908년 8월 13일부터 이듬해 윤 2월 23일까지의 약 7개월간의 종군기이다. 진중일기는 전기홍 자신이 쓴 것이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전기홍은 특히 의병장으로서 호남에 명망이 드높았는데, 격문을 국한문으로 쓰고 평민의병장을 우대하여 신분보다 공적으로 군사를 다룬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그의 사상과 인품을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홍은 전씨라 하여 녹두[綠豆: 전봉준]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항일의병은 동학군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성교당(聖敎堂)의 서양인 신부를 찾아 신식 무기의 공급을 요구한 사실 등 흥미로운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전기홍에게는 아들이 없어 백부 전병화(백운면 오정리 거주)의 손인 종하(鍾廈)가 입양되었다. 양자 종하는 전기홍이 소장하던 많은 서적과 기홍이 19세에 그렸다는 ‘조선팔도병풍’을 보관하였으며, 『해산창의록』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종하도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종주가 입양되었으나 그도 역시 아들이 없어 현재 족보에는 ‘종거’로 바뀌어 실려있다. 종하가 보관하였다는 ‘조선팔도병풍’은 해박한 지리지식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한 때 노산 이은상이 매입하려 했으나 끝내 팔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종하가 죽은 후 병풍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전기홍 의병장 추모비각(全基泓義兵長追慕碑閣)이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시동강 마을에 있으며,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840~1919. 자는 상집(祥集), 호는 소계(小溪).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며, 증 통정대부 호조참판 전창록(全昌祿)의 아들이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이 내려졌다. 정종엽(鄭鍾燁)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562~1627. 자는 휘원(輝遠), 호는 이산(駬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전규(全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전수함(全守艦)이다. 전대승이 진안읍 가림리 은천마을에 내려와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은천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한이산묘지』에 의하면 “풍채가 준수하였고 뜻이 매우 높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정유재란 때 전수함이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남해 노량진(露梁津)에서 왜적을 크게 부수고 전사하였는데, 이로 인해 전대승은 항상 외적(外敵)에 대한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거느리고 평양에서 적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병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숙종 때 예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
이도복(李道復)이 지은 회계당운(晦溪堂韻)이 있다.
-
한말의 동학운동가. 고부 출신. 전봉준의 막료로 진안의 전익호·전화삼 등과 더불어 의거에 자진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처형되었다. 봉기 이전에 백운면 오정리에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활동상은 자세하지 않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1610~?.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고조는 전이충(全以忠), 증조는 전규(全奎), 조부는 증 좌승지 전수함(全守艦). 부친은 증 예조판서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1624년 서울에 올라가 이정구(月沙李廷龜)·김상헌(淸陰金尙憲) 등에 사사하였다. 그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15세의 나이로 지원병이 되어 어가를 따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부친 전대승(全大昇)이 평양에서 순절하자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전장을 향했다. 그러나 청(淸)과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한 마음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귀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지키면서 성 밖에 출전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얼마 후 주화(主和)·척화(斥和)의 논쟁을 보고 그는 “화의는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 1637년 ‘삼전도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갈 때 세자의 배종무관으로 청(淸)에까지 따라갔다. 전동흘은 그 기회에 청의 국방태세·군사배치 등을 낱낱이 조사하여 군사상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귀국 후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또 다시 창의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장사랑(將仕郞)으로 등재되자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50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송시열이 전동흘·이상진·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면서 ‘호남삼걸’이라 불렀다. 1651년 무과에 급제, 용맹을 인정받아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강원병사, 충청병사, 황해병사, 경상좌수사 등 4수사(水使)·7병사를 역임한 후 통제사(統制使)를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러 차례 좌우포장(左右捕將)을 겸하여 치안유지에 큰 공을 세웠다.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철산부사로 재임 중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와 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가재 전동흘 신도비’(최병심)
-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都隱). 시호는 문평(文平).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로서 증조는 판공부사(判公部事) 영평군(永平君) 전단(全旦), 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전려(全呂), 부친은 좌복야(左僕射) 전희(全熙)이다. 모두 고려 때 벼슬한 사람이다. 1367년에 성균관을 창설하여 정몽주(鄭夢周)를 국자 좨주(國子祭酒)로 삼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 매일 명륜당에서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137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에 제수되었고 후에는 대사간을 역임한다. 1375년에 김의(金義)가 명(明)의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386년에 풀려나 평안백(平安伯)이 되었다.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가 정당문학을 지냈다. 1392년 김주(金澍)와 함께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환국하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이성계가 세 차례나 조정으로 나오라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하였으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마침내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江亭里)에 은거하였다. 전문식의 후손들이 진안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1400년에 정종의 간곡한 청으로 잠시 경상백(慶尙伯)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평을 받았다. 만년에 치사(致仕)한 후로는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며 생을 보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되었으며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문식의 위패는 대한이산묘 영모사(永慕祠)와 마령면 강정리 영산사(靈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
상전면 갈현리 원갈현에서 태어났다. 조선말 가뭄과 풍수해로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는 등 어렵던 시기에 ‘인색한 부자’로 알려진 전병현이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어 아사의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마을 앞에 선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1919~1991. 좌도굿 장구기능 보유자. 마령면 연장리(延章里)에서 출생. 부(父)는 전낙현(全樂玄)이다. 어려서부터 장구의 매력에 끌려 마을굿판에 뛰어들었으며, 24세 때 본격적으로 용담(龍潭)의 최상근 문하에서 익혔다. 1949년 전국농악경연대회 전북대표단 수장구로 선발되어 출전, 이 대회에서 전북대표단이 1위를 차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전국대회’ 이후 부산·순천·전북 일원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일찍이 장구에 전념했던 맏형의 영향을 받아 형제가 모두 장구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동생 삼봉(三奉)과 수봉(洙奉)은 오히려 맏형을 능가한다는 평이 중론이다. 그의 특기는 영산굿이다. 훤칠한 몸맵시와 유연한 동작, 날렵한 손놀림, 능수능란한 연기력을 겸비한 그는 전라도 좌도굿 장구의 진수를 보여주는 기능보유자였다. 후진양성에도 열성적이어서 1980년 이후 충남 금산농고 초청으로 농악대 지도, 1986년과 1987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민속촌에서 학생 및 일반인 농악을 지도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