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극례(全克禮)
운영자 23-12-18 18:44 687 hit
조선 전기 진안으로 낙향한 문무관인. 호는 낭헌(浪軒). 형조판서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증손으로 판중추부사 전사미(全思美)의 아들이다. 『진안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했을 뿐 아니라 도량이 넓고 문장이 장하여 당시의 재상 황희(黃喜)·허조(許稠) 등과도 사귀었다.” 세종 때에 정시에 올라 승문원 정자, 사헌부 정언, 호조참판,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쳐 호조판서 겸 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1455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마령면 강정리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스스로 ‘낭헌’이라 부르고 생륙신 남효온, 조여 등 절의파 사림들과 교유하며 일생을 마쳤다. 당시 사림들은 전극례의 절개를 중히 여기어 고려 칠십이현의 충절에 비유하였다. 후손 전광로(全光魯)가 찬하고 전한풍(全翰豊)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박기양(朴箕陽), 판서 민철훈(閔哲勳), 참판 김재순(金在珣), 참판 이용구(李龍九), 승지 이범석(李範錫), 승지 서광필(徐光弼) 등의 이름이 적힌 ‘도학포장’이 있으며, 이선호(李璇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유양 조중목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