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흘(全東屹)
운영자 23-12-18 18:44 689 hit
1610~?.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무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고조는 전이충(全以忠), 증조는 전규(全奎), 조부는 증 좌승지 전수함(全守艦). 부친은 증 예조판서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1624년 서울에 올라가 이정구(月沙李廷龜)·김상헌(淸陰金尙憲) 등에 사사하였다. 그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15세의 나이로 지원병이 되어 어가를 따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부친 전대승(全大昇)이 평양에서 순절하자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전장을 향했다. 그러나 청(淸)과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한 마음으로 시신을 수습하여 귀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지키면서 성 밖에 출전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얼마 후 주화(主和)·척화(斥和)의 논쟁을 보고 그는 “화의는 불가하다”고 상소하였다. 1637년 ‘삼전도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갈 때 세자의 배종무관으로 청(淸)에까지 따라갔다. 전동흘은 그 기회에 청의 국방태세·군사배치 등을 낱낱이 조사하여 군사상 전략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귀국 후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또 다시 창의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장사랑(將仕郞)으로 등재되자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50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송시열이 전동흘·이상진·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면서 ‘호남삼걸’이라 불렀다. 1651년 무과에 급제, 용맹을 인정받아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강원병사, 충청병사, 황해병사, 경상좌수사 등 4수사(水使)·7병사를 역임한 후 통제사(統制使)를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러 차례 좌우포장(左右捕將)을 겸하여 치안유지에 큰 공을 세웠다.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철산부사로 재임 중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와 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참고문헌》 『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가재 전동흘 신도비’(최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