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용담군수. 1900년 5월에 부임하였으나 이임연대는 미상이다.
  • 교육자. 진안 부귀산 아래에 육영재를 짓고, 집안의 자제와 인근의 아이들을 교육시켜 이 지방 유풍을 진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1914~1998. 원불교 3대 종법사. 법호 대산(大山). 1914년 3월 16일 성수면 좌포리에서 출생. 부친은 김인오(金仁悟). 11세 되던 1924년에 만덕암에서 원불교 교조인 박중빈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29년에 출가하여 총부에서 학원(學員)생활을 하며 박중빈과 ‘은부자(恩父子)’의 결의(結義)를 했다. 이후로 총부와 서울에서 교단의 중책을 맡아 ‘대종사’ 박중빈과 ‘종법사’ 송규(宋奎)를 보필하였다. 1962년 1월 송규가 열반하자, 2월에 후계 종법사가 되었다. 김대거는 송규의 유업을 계승하여 교서편찬, ‘삼동원(三同院)’ 개척에 주력하고, 해외교화 강화, 훈련강화, 서울회관 건립, 교도 법위향상 운동 등에 교단의 힘을 쏟았다. 33년간 종법사로 재임하면서 ‘개교 반백년 기념성업’ 추진, ‘교단창립 2대 및 소태산 대종사 탄생 1백주년 기념성업’ 등을 주도하였고, 세계적인 종교연합운동을 제창하였다. 김대거는 탁월한 지혜와 강력한 지도력으로 교단을 이끌면서 교세를 4~5배 발전시켰다. 1994년 11월에 이광정(李廣淨)에게 종법사직을 양위하고 ‘상사(上師)’로 추대되었다. 〈교리실천도해〉·〈정전대의〉등을 저술하여 교도들의 공부길을 밝혀주었고, 그 외에도 여러 권의 법문집이 발행되었다. →원불교
  • ⇒김해강
  • 1866~1942.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교육자. 자는 원재, 호는 주교(朱嶠). 공안공(恭安公) 김겸광(金謙光)의 후손으로 김중정의 9세손이고 아버지는 김재헌이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용담향교 직원으로 재임하였다. 일찍부터 학업을 성취하였다. 1924년 주자천의 위쪽에 주천사를 창건하여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주천사는 1975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 39대 진안군수. 1991. 7. 16 부임하여 1992. 7. 11까지 1년간 재임하였다.
  • 1852~1914.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의병장. 별명은 도현(燾鉉),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선포 후 안동, 함창, 태봉, 강릉, 삼척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14년 11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에서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1871~1933. 한말의 의병장.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菴). 대전 출신.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승(秘書丞)에 이르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6년 의진을 구성, 금산·용담·전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은 뒤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남원, 구례, 함양, 순창 등지에서 접전하며 활약하였다. 9월에는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으나 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곧 해진하였다. 그 후 충청도·강원도·경기도 등지를 돌아다닌 뒤 민경호(閔競鎬) 휘하의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1908년 2월까지 보은, 남악동, 용담군 동향, 무주, 거창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고향인 회덕으로 내려가 치료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27대 진안군수. 1975. 6. 13 부임하여 1976. 9. 6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733년 9월에 부임하여 1733년 9월 사임하였다.
  • 상서원(尙瑞院)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承)에 추증되었다. 전우(田愚)가 명을 짓고 아들 김영철(金永哲)이 글씨를 쓴 묘갈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421~1495.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자술(子述), 호는 오매당(寤寐堂).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민의공(敏懿公) 김사이(金思頤)이다. 1438년(세종 20)에 과거에 급제한 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면서 균공법(均貢法)을 건의하였고,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문종 때에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진법(陳法)을 마련하여 올렸다. 1453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장인 황보인(皇甫仁) 등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변[계유정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와 이후 3년 동안 은둔했다. 다시 1456년에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륙신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심정적으로 동정하여 진안군 부귀면 오룡리에 은둔하였다. 당시 관찰사였던 이석형(李石亨)이 ‘자나 깨나 (옛 주군을) 잊지 않는다’는 뜻의 ‘오매당(寤寐堂)’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1882년에 병조판서 조영하(趙寧夏)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그를 배향한 재각 역시 오매당(寤寐堂)이라 부른다.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9대 진안군수. 1955. 5. 4 부임하여 1956. 12. 17까지 1년 7개월간 재임하였다.
  • 호는 절재(節齋). 병조정랑을 지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과 더불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통정대부에 추증되었고, 이회근(李晦根)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