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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자는 경언(敬彦).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으로 전영탁(全永鐸)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옳지 못한 일을 보고 그냥 넘기지 않았고 용기와 지략도 매우 뛰어났다. 진안에서는 1919년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해 수 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고, 4월 3일에는 주천면, 4월 6일에는 마령면, 4월 12일에는 성수면, 4월 13일에는 다시 마령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전성권도 사람들을 규합해 만세를 부르짖었는데 그 위엄에 감히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인들 또한 위세에 눌려 따라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일본 헌병대에 잡혀 수년을 복역하였다. 《참고문헌》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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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출신으로 전해지는 개항기 의병. 이석용(李錫庸)의 의병대에 가담하였다. 1907년 이석용이 지은 ‘격중가(檄衆歌)’(←)를 듣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김사범(金士範)·윤명선(尹明善)과 함께 후군장(後軍將)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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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은재. 본관은 천안으로써 문평공 문식의 후손이며 월암 규의아들이다. 부친이 적에게 죽음 당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정유년에 의거하여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노량에서 순절하였다. 숙종조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사적이 절의록에 실렸다.
號隱齋 貫天安 文平文軾后 浪庵奎子 痛父死于敵 丁酉擧義 從忠武公李舜 臣 殉節露梁 肅宗朝贈禮判 事載節義錄
진안향교지2009, 증보판 진안향교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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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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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 호는 진명(眞明), 진안읍 군상리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진안군 부군수급의 직위로 근무하던 중 경술국치의 낌새가 보이자 이를 반대하고 진안 우화산의 의병들과 물질적·정신적으로 비밀리에 협조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해 당산(堂山: 진안읍 군하리 소재) 근처의 나무에 매달린 채 불에 타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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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958. 일제강점기 진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자는 보익(補益), 호는 운암(雲巖). 전대현(全大鉉)의 아들이다. 마령면 계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에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吳基烈)·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으나 출동한 헌병의 제지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만세 운동을 벌였고, 특히 4월 13일에는 마령 장날을 맞아 마령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영상은 담력이 대단하여 일본 경찰도 그 앞에서는 벌벌 떨었으며, 일본 경찰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윽박질렀다고 한다. 일본 경찰도 온 몸을 떨면서 만세를 부르고서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붙잡혀 갇혔는데 벽을 무너뜨리고 탈출하였다. 하지만 또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5년 마령면 계서리 오동마을 어귀에 ‘전영상 선생 항일 독립운동 기적비(全永祥先生抗日獨立運動紀蹟碑)’가 서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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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57. 자는 덕표(德表), 호는 송암(松菴).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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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1928. 자는 국명(國明), 호는 호은(湖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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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화순(和順),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대호군 전극례(全克禮)의 후손이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한 효행비명이 있다. 아들 전진권(全振權) 또한 효성이 뛰어났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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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위은(渭隱).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영조조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좌승지가 내렸다. 김상두(金相斗)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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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1911. 자는 덕서(德瑞).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다. 부친은 전재환(全載煥)으로 성효가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내렸다. 손자 전경근(全景根)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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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60. 원불교종교가.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전음광은 1909년 6월 17일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朴重彬)를 처음 만난 것은 1923년(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원불교에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ㆍ강연ㆍ상시일기ㆍ감각감상ㆍ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년(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ㆍ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이후 원불교의 교중 출판사업으로 《월말통신》,《회보》등의 발행을 주도하는가 하면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익산군이나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년(원기45) 7월 21일 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원불교에 전무출신했다.《참고문헌》 『원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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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성원(聲遠), 호는 용재(庸齋).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 성균생원(成均生員) 전열(全烈)의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이 청군(淸軍)에게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종형 전응철(←全應喆), 정동협(←鄭東俠), 신성식(←辛成式) 등과 의병을 모으고 가재(家財)를 팔아 군량(軍糧) 수백 석을 마련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렀으나 이미 조선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한탄하며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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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중기 의병. 자는 백언(伯言), 호는 우재(愚齋). 문평공(文平公) 전문식(全文軾)의 후예로서 전계종(全繼宗)의 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서울을 지키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여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응철은 이흥발(李興渤), 이기발(李起渤), 최온(崔縕), 양만용(梁曼容), 유즙(柳楫) 등이 함께 내놓은 격문을 보고 분발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사촌 동생 전응종(全應鍾), 정동협(鄭東俠), 신성식(辛成式) 등과 함께 각지의 의병과 가동 수백 명을 이끌고 경기도 과천(果川)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미 조선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천거되었다. 자세한 사적은 『창의록(倡義錄)』에 적혀 있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