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식(全文軾)
운영자 23-12-18 18:44 684 hit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都隱). 시호는 문평(文平).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로서 증조는 판공부사(判公部事) 영평군(永平君) 전단(全旦), 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전려(全呂), 부친은 좌복야(左僕射) 전희(全熙)이다. 모두 고려 때 벼슬한 사람이다. 1367년에 성균관을 창설하여 정몽주(鄭夢周)를 국자 좨주(國子祭酒)로 삼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 매일 명륜당에서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137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에 제수되었고 후에는 대사간을 역임한다. 1375년에 김의(金義)가 명(明)의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386년에 풀려나 평안백(平安伯)이 되었다.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가 정당문학을 지냈다. 1392년 김주(金澍)와 함께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환국하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이성계가 세 차례나 조정으로 나오라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하였으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마침내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江亭里)에 은거하였다. 전문식의 후손들이 진안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1400년에 정종의 간곡한 청으로 잠시 경상백(慶尙伯)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평을 받았다. 만년에 치사(致仕)한 후로는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며 생을 보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되었으며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문식의 위패는 대한이산묘 영모사(永慕祠)와 마령면 강정리 영산사(靈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2009),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