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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911. 자는 윤실(允實). 정황(丁熿)의 후손이며, 지중추(知中樞) 정희남(丁熙南)의 아들이다.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정종엽(鄭鍾燁)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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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1934. 자는 문찬(文贊), 호는 회당(悔堂).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후손이며, 승훈랑(承訓郞) 정존도(鄭存道)의 손자이고, 통정(通政) 정성수(鄭成綏)의 아들이다. 고종조에 음사(蔭仕)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아들 정관조(鄭觀朝)가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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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4년 7월에 부임하여 1864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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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경홍(敬洪). 호는 운재(雲齋). 충간공(忠簡公) 정황(丁熿)의 후손이며, 감찰 정기석(丁基錫)의 아들이다. 동생 참봉 정현규(丁顯圭)와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윤영구(尹寧求)가 글씨를 쓴 쌍효비명(雙孝碑銘)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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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42년 6월에 부임하여 1845년 7월 원주로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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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98년 7월에 부임하여 1700년 5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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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1910. 전라북도 익산 출신.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경필(敬必). 1876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 겸 선전관(親軍別營哨官兼宣傳官)에 임명된 뒤 충무위 좌랑(忠武衛左郞)으로 옮겨졌다. 그 뒤 훈련원 주부와 수주부(首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적문(討賊文), 자제들에게 주는 글과 종족들에게 주는 글을 써 놓고 완산부로 떠났다. 안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토역문(討逆文)을 제시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가 의관을 정제한 다음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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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657.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의병. 자는 개부(蓋夫), 호는 모와(慕窩). 대사성 정곤(鄭坤)의 7세손이며 상호군(上護君) 정건(鄭健)의 아들이다. 외증조부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열심히 공부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숙부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 및 둘째 아들과 함께 가동(家童) 수 십 명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전응철(全應哲)·전응종(全應鍾)·신성식(辛成式)과 더불어 군량을 모아 여산(廬山) 모의소(募義所: 의병모집소)로 갔다. 다시 과천까지 행군하였는데 이미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의 천거로 예빈시 정(禮賓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였다. 사적이 『호남절의록』에 쓰여 있으며, 한기유(韓起愈)가 지은 행장(行狀)이 전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이산묘지』(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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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수. 1948. 10. 26 부임하여 1948. 12. 24까지 2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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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자는 의백(儀伯), 호는 하은(荷隱). 충렬공(忠烈公) 정인조(鄭仁祚)의 후손이다. 김태현(金泰鉉)에게 사사하였다. 이손(李巽)이 찬한 유허비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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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1912. 자는 순경(順慶), 호는 양헌(養軒).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후손이며, 도정(都正) 정계순(鄭繼淳)의 손자이고 승훈랑(承訓郞) 정존도(鄭存道)의 아들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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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용담군 일서면 성암리(현 주천면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초순경에 창의 기병한 유지명의 삼남 의병대에 가담하여 약 2년 동안 용담, 고산, 금산, 은진 등지를 무대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07년 의진 30여 명이 심상의·노원섭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금산읍을 습격하여 일본인 등 12명을 살상하였고, 우편취급소와 세무서의 건물, 그리고 일본인 가옥 9동을 불태우고 양총 2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에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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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19년 8월에 부임하여 1822년 3월 도백 홍섭주가 친족이므로 상피(相避)하여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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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79년 11월에 부임하여 1585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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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