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6∼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다. 선조 22년에 역모자로 몰리자 자결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인은 불분명하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기는 하나, 이로 인해 정여립은 한국사 최초의공화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1570년(선조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뒤 은거하며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변이 있어 피신하다가 자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은 이를 부정하여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천 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며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 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중국 하남(河南). 증 병조판서 정억강의 후손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가족 및 친족들과도 화목하였다. 효행은 『진안지』에 실려 있다. 1552년에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837~1897. 호는 청헌(淸軒).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정석호(鄭碩浩)의 아들이다. 1865년에 장릉 참봉(長陵參奉)이 되었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1741~1822.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원지(元之).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4세손이며 정귀발(鄭貴發)의 아들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의지가 굳고 행실이 밝았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 ?~1910. 한말의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호는 소송(小松).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예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의 직에 있었다. 언로가 끊기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 있다가 경술국치의 소식을 전해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1744~1803. 조선 후기 진안의 학자. 자는 원강(元綱).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4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8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재예가 특출하고 유학에 능하였으며 효행이 남달리 뛰어나 근린의 칭송이 자자했다.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798~1876.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호는 근재(根齋), 자는 춘경(春卿). 조부는 정남추(丁南樞), 부친은 정우언(丁宇彦)이다.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반남 박씨의 서당인 지선당(←止善堂)에서 공부하였다. 18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한국문화원연합회(http://www.kccf.or.kr/)
  •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일찍이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문학과 효행이 탁월하여 송환기가 졸헌(拙軒)이라는 호를 내렸다.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1906년에 9품 종사랑(從仕郞)에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에 정려(→정재효 정려)를 받았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의 문화재』(진안문화원, 1998),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
  • 1885.03.13.~1940.11.01. 일제강점기 진안의 학자. 자는 택신(宅新), 호는 수당(修堂). 정진희(鄭鎭喜), 정진용(鄭晉鏞)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증조부는 정수세(鄭需世), 조부는 정인민(鄭寅敏), 부친은 정성모(鄭聖謨)이다. 유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항일의병 투쟁에도 적극 나서서 학행일치(學行一致)의 삶을 살았다. 성수면 좌포리에서 태어났고, 전우(田愚)와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힘써 연마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은둔의 삶을 살았다. 이후 이병연(李炳淵), 전인권(全麟權) 등과 함께 이석용(李錫庸)과 전기홍(全基泓) 등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협력하였다. 1911년 진안에서 이석용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1912년 이석용이 의병 활동의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에 가입하여 항일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석용의 종군기록인 『창의일기』가 일본 경찰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자 그 책을 자기 집에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이석용이 일경에 붙잡히자 정종엽은 일경을 피하여 수시로 개명하고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마령면 계남리 선산 재각인 도장각(←道藏閣)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수당유고(修堂遺稿)』가 있다. 2011년 진안문화원에서 번역한 『국역 수당유고』가 출판되었다. 2003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내산사(萊山祠)에 향사(享祀)되어 있다. 《참고문헌》 『수당유고(修堂遺稿)』, 『진안지』(진안향교, 1925), 『진안군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89), 『진안의 금석문』(진안문화원, 2001), 『전라북도 금석문 대계』2(전북역사문화학회, 2008), 『전북지방의 선정·공적·기념비』(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 2012)
  • ⇒정종엽
  • 10대 진안군수. 1956. 12. 17 부임하여 1959. 1. 10 까지 2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 진안현감. 1686년 6월에 부임하여 1688년 2월에 이임하였다. “인(仁)으로써 선정을 하고 백성을 구휼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자는 재수(在樹), 호는 난파(蘭坡). 충렬공 정인조(鄭仁祚)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대현(金大鉉)이 양대효행기의 서(序)를 짓고 김종한(金宗漢)이 찬하고 신현태(申鉉台)가 글씨를 쓴 효자비문이 있다. 《참고문헌》 『정태성 효자비(鄭泰成孝子碑)』,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지』(진안군지편찬 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