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785년 4월에 부임하여 1785년 10월 고성으로 전임하였다.
  • 용담현령. 1884년에 부임하여 1886년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정헌해
  • 1819~188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무관. 자는 사유(士裕), 호는 운송(雲松). 처음 이름은 헌규(憲奎)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던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11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품성이 곧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언제나 공정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모시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1861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讓衛副護軍)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 겸 경복궁 오위장(景福宮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유림의 추천으로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의 찬양문을 받았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용담현령. 1646년에 부임하여 1649년 사망하였다.
  • 용담현령. 1841년 1월에 부임하여 1842년 6월에 이임하였다.
  • 1779~181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초명은 성언(成彦).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5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9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적극적이었으며 효행심이 두터웠다.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호는 양성헌(養性軒). 신라육부장(新羅六部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예로 고려조 문하시랑(門下侍郞)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 문성공(文成公) 정혼(鄭琿)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뒤에 최영(崔瑩)의 막료가 되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를 지냈다. 그 후 문하평리 겸 응양위상장군(門下評理兼應揚衛上將軍)으로 있다가 조선 개국의 공으로 순충분의 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예조 겸 문하시중 첨의찬성 도평의사사 도총부도총관(大匡輔國崇祿大夫判禮曹兼門下侍中僉議贊成都評議司事都摠府都摠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올랐다.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景)’이고 특별시호는 ‘무열(武烈)’인데, 그 뜻은 “온량으로 덕을 좋아하였음을 良이라 하고 의로써 백성을 구휼한 공을 景이라 한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예장(禮葬)하록 하였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조경화(1861~?) 용담군 일동면 양지 출신,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문태서(文泰瑞) 호남의병단에 가입하여 전북 장수·진안·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조경화를 포함한 의병대들은 1906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거의(擧義)한 후, 무주에서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1906년 9월 하순에 장수를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병대에서 김준대(金俊大)·고명주(高明柱)·고원중(高元仲)·신치수(辛致守)·안왈오(安曰五)·심우상(沈尤相)·원도숙(元道淑)·하준태(河俊太)·한청여(韓淸汝) 등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진안·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 및 군수 물자를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체포되어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 용담현령. 1765년 1월에 부임하여 1768년 6월 사헌부감찰이 되었다가 영천군수로 영전하였다. 관풍루를 건립하였다.
  • 진안현감. 1842년 1월에 부임하여 1844년 6월 봉고파직 당했다.
  • 용담현령. 1825년 12월에 부임하여 1826년 3월 처의 병으로 사직하였다.
  • 진안현감. 1857년 7월에 부임하여 1857년 11월 수원판관으로 전임하였다.
  • 1827~1905. 한말의 문신, 순국열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치현(穉顯),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고, 185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속하여 세상이 어지럽자 가평에 은퇴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좌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입궐하여 “을사늑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席藁)하며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 헌병에게 강제로 연행되었다.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62년 4월에 부임하여 1863년 11월 경산현령과 맞바꾸어 전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