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1887.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무관. 자는 사유(士裕), 호는 운송(雲松). 처음 이름은 헌규(憲奎)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던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11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품성이 곧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언제나 공정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모시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1861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讓衛副護軍) 도총부 도총관(都總府都摠管) 겸 경복궁 오위장(景福宮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유림의 추천으로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의 찬양문을 받았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