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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2003.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던 진안농악 상쇠. 백운면 백암리 출생. 풍물을 하던 부친(1947년 전국대회에 참가한 장구의 조남주)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풍물을 익혔고, 좌도굿의 대가인 노문길, 한귀동, 김수동, 장두만, 김달마 등에게서 어려서부터 가락을 배웠다. 광복 후 교원양성소를 거쳐 초등학교 교사 재직 시 풍물을 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풍물에 전념하기 위해 수년간 계속했던 교직을 사직하고 전국 여러 곳의 학교를 전전하며 후진을 양성하다가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진안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후 지방무형문화재 뜬쇠가락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였다. →진안농악 상쇠 조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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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61년 7월에 부임하여 1864년 6월 고성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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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진안현감. 1826년 1월에 부임하여 1829년 12월 한산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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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1859. 조선 후기 진안출신의 학자. 초명은 석규(錫奎), 자는 자관(子觀), 호는 국헌(菊軒). 충익공 조문택(曺文澤)의 후손으로 조상학(曺尙學)의 아들이다. 마령면 송내리에서 태어났으나 1819년 완주군 비봉면 월곡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기상이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호학의 기질이 있어서 가전의 학문을 이어받고 경서 외에도 『주자대전』·『성리대전』·『근사록』·『율곡전서』 등도 깊이 탐구했다. 호남의 유림이 조석하를 관찰사 정범조(鄭範朝)에게 천거하여, 1854년 조정에서 학행으로 천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저서는 8책이나 되었는데 화재로 유실되었고 그 뒤 여기저기 필사하여 모은 『국헌집(菊軒集)』3권 2책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헌집』, 『완주군사』(완주군사편찬위원회, 1986),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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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16년 6월에 부임하여 1818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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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34년 1월에 부임하여 1836년 2월 삼등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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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과거에 급제하여 1615년에 부임하여 1616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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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12년에 부임하여 1615년 온양현령으로 승진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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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19년 2월에 부임하여 1721년 10월 어사의 장계로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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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97년에 부임하여 1899년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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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22년 4월에 부임하여 1822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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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봉(1891~1910.11.07.)은 용담군 일동면 봉곡리 출신이다.
문태수의진에 참여하여 1909년 2~3월경 전북 금산군 어재리(於在里), 같은 해 음력 3월 4일 용담군 일동면(一東面) 봉곡리(鳳谷里), 3월 12일 금산군 수통동(水通洞)에서 군자금과 군수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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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40년 8월에 부임하여 1745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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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00년 8월에 부임하여 1803년 10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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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24. 12. 24 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