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4~1916. 조선 후기 진안의 학자.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만오(晩塢). 조석희(曺錫羲)의 아들이다. 진안군에서 태어났으나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마음씨가 단정하고 성품이 인자하였다. 1886년에 크게 흉년이 들자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했다.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 『만오유고(晩塢遺稿)』1책[인쇄본]이 전하고 있는데 이를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 조호열이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만오유고』(조형승), 『완주군사(완주군사편찬위원회, 1986),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진안현감. 1866년 1월에 부임하여 1867년 10월 대구판관으로 전임하였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 1194~1260. 고려 후기 남송에서 귀화하여 진안에 은거한 학자. 본관은 중국 신안(新安), 호는 청계(淸溪). 증조는 주희(朱熹)이고 조부는 주야(朱埜), 부친은 주거(朱鋸)이다. 아들은 주여경(朱餘慶)이고 손자는 주열(朱悅)이다. 중국 하남성 낙양시 신안현에서 태어났다. 남송의 과거에 급제한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태학사(太學士)를 거쳐 관직이 비서각직학사(秘書閣直學士)에 이르렀다. 그 후 점차 국운이 쇠하던 남송이 원(元)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1212년 가족과 문인들인 도성하(陶成河)·두행수(杜行秀)·섭공제(葉公濟)·유응규(劉應奎)·조창(趙昶)·주세현(周世顯)·진조순(陳祖舜) 등 7명의 학사(學士)들을 이끌고 고려로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전라도 금성[錦城 : 현 나주시]에 거주하였다가, 얼마 뒤 원의 세조가 고려로 피신한 송의 구신(舊臣)들을 압송하려 하자 다시 전라도 능성[綾城 : 현 화순군]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적덕(積德)으로 바꾸었다. 이후 다시 무주 무풍면(茂豊面)을 거쳐 진안군 주천면 신안촌(新安村)에 은거하다가 1260년 사망하였다. 주천면 주양리의 주천서원(朱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세창서관, 197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전북향교원우대관』(전라북도향교재단, 1994)
  • 16대 진안군수. 1961. 7. 21 부임하여 1962. 4. 5까지 8개월간 재임하였다.
  • 채도석(1915.08.16.~1984.09.03.)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 203 출신 항일투사, 1932년 전주농업학교 재학 중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사회주의 이론 연구를 통해 일제 식민지통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그는 사회주의 이론 연구를 조직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 1932년 9월에 이강진(李康鎭)·신승우(申升雨) 등과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박영무(朴永武) 등 전주농업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원을 확대해 가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혀 1932년 12월 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비밀결사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33년 10월 16일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2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초를 치르다가 1935년 10월 2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41대 진안군수. 1993. 5. 26 부임하여 1994. 12. 31까지 1년 7개월간 재임하였다.
  • 華 1883~1954. 종교가. 본명은 인경. 원불교 법호는 삼타원(三陀圓). 법훈은 대호법.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 개금실에서 부친 순화(順化)와 모친 진정만옥(陳正滿玉)의 일곱자매 중 6녀로 출생. 13세에 원 없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비관하여 28세에 동네 방죽에 투신자살을 기도, 지나가던 여승에 의해 구해져 그로부터 출가하여 한강변 종남산 미타사, 계룡산 동학사에서 나반존자 주력수행을 했다. 이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다가 각지 용한 기도터를 찾아다니며 기도하는 한편 비단장수를 하며 절집의 화주 노릇도 했다. 진안 좌포 김승지의 폐병에 걸린 아들을 낫게 하여 신임을 얻어 만덕산 산제당과 그 일대의 산전을 관리하게 되면서 임실 개금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최도화는 산등 넘어 미륵사에 내왕하며 화주 노릇을 하게 되고 여기서 정산종사를 만나 생불님으로 받들게 되며,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원불교 대종사)를 뵙고 진안 마령의 전삼삼ㆍ전음광 모자를 이끌어 전주로 이사하게 하여 전주에 회상 창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참고문헌》원불교사전
  • 1683~1756.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인.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모재(追慕齋).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후손이다. 조부는 최진(崔璡), 부친은 최이관(崔以官)이다. 아들은 현위(玄暐), 현휘(玄暉), 현요(玄曜)이다. 증조부 최종(崔琮)이 세조의 찬위를 보고 벼슬의 뜻을 버리고 진안으로 들어와 숨어 산 이후로 마령면 평지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송명흠(宋明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심경』, 『근사록』, 『사자소학』, 『중용』, 『대학』에 이르기까지 숙독하여 천리와 인성에 대해 궁구하였다. 도덕심과 정의감이 강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여 큰 흉년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키워서 혼인까지 시키기도 했다. 학행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뛰어난 덕을 지닌 이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최두칠은 중앙 정계에서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사회에서 학문과 효행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진안군 일대에는 지금도 최두칠과 그 선조 최양에 관한 설화들이 유전되고 있음을 볼 때, 평지리 원평지마을의 역사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쓴 묘비명이 있다. 1879년에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마령면 원평지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향교, 1925),『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군·진안문화원, 2004)
  •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추(士樞), 호는 송사(松史).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최세원(崔世遠)의 아들이다. 글을 배움에 있어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아니하고 암송(暗誦)하였으며, 운(韻)을 부르면 곧바로 시문(詩文)을 지어낼 정도로 문재(文才)가 훌륭했다. 그리하여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집안 형편이 빈한한 중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길지(吉地)를 알려주었다. 꿈대로 자리를 찾아 온 재산을 기울여 그 자리에 유택을 정했다”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2살이었다.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읽고 행하며 그 뜻을 뒷사람들에게까지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4년에 사림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인구(李寅龜)가 지은 묘표(墓表)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성수면 덕산재에도 배향되어 있다. →덕산재.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1912~1975. 천주교 신부. 진안읍 군하리 출생. 세례명은 요한이다. 부친은 충청도에서 살았으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진안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집에 공소를 설립하고 종교의식을 집전했다. 1920년 진안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후 대구로 유학하여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사제로 서품되어 정읍 본당, 남원 본당, 임실 본당 등에서 주임 신부로 활동하였고, 1935년 전주 해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2개월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성신대학의 전신, 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1948년 부학장, 1949년 도서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51년 대구교구 출판부장 겸 『천주교회보』와 『대구매일신문』의 사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논문과 호교론을 발표했다. 이듬해 다시 성신대학 교수로 전임되어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가의 작사 외에 많은 시·수필·번역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0년 3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번역으로 제2회 ‘한국펜클럽’ 번역상을 수상했다. 1960년 8월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신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1962년 성가 수녀회 지도 신부, 1963년 부천(富川) 소명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뒤 1965년 카톨릭 공용어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의 기도, 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작성했고 196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대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하였다. 1968년 구약성서의 시편을 완역했고 1974년에는 로마가르멜회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을 받았다. 최민순은 평소 많은 시와 수필을 통하여 또 특별한 강론이나 피정지도를 통하여 사제나 평신도들에게 영성(靈性)을 심어 준 영성 신학자로서, 또 시인으로서 존경받았다. 수필집 『생명의 곡』(경항잡지사, 1954), 시집 『님』(성바오로 출판사, 1955), 『밤』(성바오로 출판사, 1963), 유교집 『영원에의 길』(카톨릭출판사, 1977). 역서로는 단테의 『신곡』(을유문화사, 1960),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정음사, 1960), 아우구스티노의『고백록』(성바오로 출판사, 1965), 『예수의 데레사』, 『완덕의 길』(성바오로 출판사, 1967), 『성경의 시편』(카톨릭출판사, 1968), 『영혼의 성』(성바오로 출판사, 1970), 『십자가의 요한』, 『깔멜의 산길』(성바오로 출판사, 1971), 『어둔 밤』(성바오로 출판사, 1973) 등. 묘는 서울시 용산구 용산 성직자 묘지에 있다. 1960년 3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번역으로 제2회 한국펜클럽 번역상 수상. 1974년 로마 가르멜회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 《참고문헌》 『가톨릭대사전』,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최병무(1922.07.05.~1999.06.29.)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642 출신 항일투사, 이명 최무웅(崔武雄), 1940년 5월 11일 충남 금산(錦山)읍의 각종 업소에 근무하는 18세 내외의 청년동지 7명과 더불어 친목을 위장한 항일결사 시장친우계(市場親友)를 조직하고 계장이 되었으며 동년 7월 진락동지회(進樂同志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일제의 지원병 강제모집에 반대하여 불합격자초운동(不合格自招運動)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매월 15일에 모임을 갖고 이의 추진상황을 검토하였다. 만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접선하여 항일운동의 임무를 띠고 귀국도중 1941년 3월 26일 신의주역에서 잠복중이던 일경에 붙잡혀 1942년 5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호는 흠재(欽齋). 전주에 거주하였으며 학문이 깊어 문명이 높았다. 진안지방에도 많은 시문이 전한다. 양창권(梁昌權)이 지은 제문이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50~1921. 자는 성필(成弼),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후손이다. 서광필(徐光弼)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372~1455. 조선 전기의 문신. 『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명환(名宦)’으로 실려 있다. 자는 휘지(徽之). 선보(善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자충(崔子忠)이고,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최윤문(崔潤文)이다. 1399년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0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09년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1414년에 장흥고사(長興庫使)가 되었는데, 이 때 질이 나쁜 종이를 납궐(納闕)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32년에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이 되었다. 이듬해 상정색녹사(詳定色錄事) 한유린(韓有隣)과 책봉도감녹사(冊封都監錄事) 허완(許完)에게 7등급을 초과하여 참직(參職)을 제수하자, 3등급을 초과할 수 없는 초천법(超遷法) 규정을 들어 이의 시정을 상소하였다. 누천(累遷)하여 성균관 사예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퇴거하여 경사를 읽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뒤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담현 명환(名宦)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사유가 진안 출신은 아니고 용담현령을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최항이 지은 「최사유 행적」에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조선왕조실록』,『문과방목』, 『조선명신록』, 『국역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