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사추(士樞), 호는 송사(松史).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최세원(崔世遠)의 아들이다. 글을 배움에 있어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아니하고 암송(暗誦)하였으며, 운(韻)을 부르면 곧바로 시문(詩文)을 지어낼 정도로 문재(文才)가 훌륭했다. 그리하여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다. “집안 형편이 빈한한 중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길지(吉地)를 알려주었다. 꿈대로 자리를 찾아 온 재산을 기울여 그 자리에 유택을 정했다”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2살이었다.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읽고 행하며 그 뜻을 뒷사람들에게까지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4년에 사림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인구(李寅龜)가 지은 묘표(墓表)가 전해져 오고 있다. 성수면 덕산재에도 배향되어 있다. →덕산재.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