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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96년 1월에 부임하여 1798년 3월 광산현감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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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1424. 고려 말 조선 초기 진안의 문신.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륙(晩六)·장륙당(藏六堂). 부친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지(崔贄)이다. 14세에 외숙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376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부상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384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재임하던 중 서북면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후 대사간과 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순절하자 벼슬을 내놓고 백운면 중대산[中臺山:현 팔공산]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395년 태조가 사람을 보내 국정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관직과 전록(田祿)을 하사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그의 선산이 있는 완주군 소양면 대승리로 옮겨 만년을 보냈다. 저서로는 『만륙일고』가 전해지고 있다. 마령면 강정리의 영계서원(靈溪書院)과 전주시의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으며, 1834년에 충익(忠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백운면 반송리에 그를 기리는 구남각이 있고 안에 비를 세웠다. 비에는 기정진(奇正鎭)이 찬한 둔적유허비명이 새겨져 있다. →구남각.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 『만륙일고(晩六逸稿)』, 『전주 최씨 문충공 자손 대동보』, 「만륙 최선생 행장」,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완주군사』(완주군사편찬위원회, 1987),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전북 향교원우대관』(전라북도향교재단, 1994), 한국 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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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진안군수. 1963. 3. 24 부임하여 1964. 6. 24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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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명환(名宦)’으로 실려 있으나 내용은 미상이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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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21년 2월에 부임하여 1722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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鉉 1833~1906. 한말의 애국지사.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 출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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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학자. 호는 우은(愚隱).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5세손이다. 학문이 매우 뛰어났으며 경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의 참상을 보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받지 않고 오직 독서와 구도(求道)에 힘썼다. 노수신(盧守愼), 정철(鄭澈), 조헌(趙憲) 등과 교분이 있었으며, 정여립(鄭汝立)과도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으나 결별하였다고 한다. 이재(李縡)가 찬한 추천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최인수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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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운 (崔子雲)
자운은 자이며 이름은 준용(俊庸), 호는 양재(陽齋), 본관은 전주(全州) 로 만육 양(晩六 澄)의 후손이며 진안군 마령면 평지(坪地) 출신이다. 학 덕이 있어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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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2001. 호는 남정(南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에서 태어나 마령면 동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령보통학교를 나오고 이모 최도화의 지도로 원불교에 귀의, ‘유일학림’(2기)을 수료하였다. 원광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국전 서예부에 특선, 서예활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국전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원광대학교에 세계 최초로 서예학과를 신설하고 교수로 후학 양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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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우국지사. 진안에서 태어났다. 최제학의 형이다. 순창에서 창의에 실패한 최익현과 임병찬은 1906년 7월에 대마도로 호송되었다. 그 해 11월 최익현이 병이 났다는 급보가 오자 바로 대마도로 달려가 문병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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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03.17.~1961.05.15.)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자는 중열(仲悅), 호는 습재(習齋). 아버지는 지은(芝隱) 최성호(崔成鎬)이다. 성수면 도통리에서 태어났다.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6년부터 최익현(崔益鉉)·전우(田愚)·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 등 당대 대학자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나, 최익현을 흠모하여 사제의 의를 맺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모색하였다. 1906년 4월 최익현·임병찬(林秉瓚) 등과 함께 정읍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거(義擧)하였다. 이때 참모직을 맡아 의병소집 및 군비(軍備)편성 등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감금 당하였다. 출옥 후 대마도로 최익현을 찾아가 극진히 간병하였으나 끝내 최익현이 순국하자 부산으로 운구(運柩)하여 장례를 극진히 치렀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윤자신(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로는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을 오르내리며 통한의 시간을 보내다 경남 하동군 청암면(靑岩面) 학동(鶴洞)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였다. 『습재실기(習齋實記)』가 1963년 석판본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그는 또 일찍이 화가를 시켜 최익현의 초상화 2장을 그리게 하였던 바, 1장은 경찰에 빼앗겼고 1장은 장진욱에게 보관하라 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집안에 있는 삼우당 터에 최익현의 영당을 짓기 위함이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최익현의 사적을 수집하고 그것을 보완하여 『일성록』이라 이름 지었으며, 또 성묘도(聖廟圖)라는 책을 편술하였다. 1988년 ‘애국지사 습재 제학 선생 기념비(愛國志士習齋濟學先生紀念碑)’가 성수면 도통리 목동마을에 건립되었다.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습재실기(習齋實記)』, 『매천야록(梅泉野錄)』, 『진안향교지』(진안향교, 1989),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 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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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증손이다. 형 최침(崔琛)과 함께 진안으로 들어와 살았다. 후손 최상면(崔相冕)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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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진안군수. 1989. 9. 1 부임하여 1990. 5. 29까지 9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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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운(子雲), 호는 양재(陽齋). 최양(崔瀁)의 후손이며 마령면 평지 출신이다. 학덕이 있어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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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36년 8월에 부임하여 1640년 12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