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학자. 호는 우은(愚隱).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5세손이다. 학문이 매우 뛰어났으며 경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의 참상을 보고 산림에 은거하였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받지 않고 오직 독서와 구도(求道)에 힘썼다. 노수신(盧守愼), 정철(鄭澈), 조헌(趙憲) 등과 교분이 있었으며, 정여립(鄭汝立)과도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으나 결별하였다고 한다. 이재(李縡)가 찬한 추천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최인수 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