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한정(太漢鼎)
운영자 23-12-18 18:44 755 hit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국보(國輔), 호는 회당(晦堂). 병조판서 태응진(太應辰)의 후예로 통정(通政) 태우림(太雨霖)의 아들이다. 형 태오정(太敖鼎)과 아우 태응정(太膺鼎) 등 삼형제가 같은 글방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그 중에서 그의 재주가 특히 뛰어났다. 목민관(牧民官)들의 천거로 1573년에 장사랑(將士郞)과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용성(龍城, 지금의 남원)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학수도(講學修道)하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카 태우(太瑀), 종손(從孫) 태시경(太時慶), 셋째 아들 태용(太龍), 족증손(族曾孫) 및 가동 수십 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산길에서 종일토록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적이 쏜 탄환에 전사하였다. 그 후 아들, 조카, 손자 등 여러 일가들은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의 진에 가담, 모두 남원에서 함께 전사하였다. 이행연(李行淵)이 지은 행장(行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