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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호는 봉강(鳳岡). 고려조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의 후예로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차남이다. 견문이 넓고 이집(李集)의 문인으로 많은 기림을 받았다. 판서(判書) 이식(李軾)은 그의 장인이었으나 그의 인격과 도덕을 존중하여 사우(師友)처럼 여겼다. 응양위 상호군(鷹揚衛上護軍)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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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1881. 자는 태여(台汝). 충익공(忠翼公) 최양(崔瀁)의 후손이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이 내렸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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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1955. 자는 봉진(奉珍), 호는 송은(松隱). 발해 태조 대조영(大祖榮)의 후손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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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국보(國輔), 호는 회당(晦堂). 병조판서 태응진(太應辰)의 후예로 통정(通政) 태우림(太雨霖)의 아들이다. 형 태오정(太敖鼎)과 아우 태응정(太膺鼎) 등 삼형제가 같은 글방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그 중에서 그의 재주가 특히 뛰어났다. 목민관(牧民官)들의 천거로 1573년에 장사랑(將士郞)과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용성(龍城, 지금의 남원)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학수도(講學修道)하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카 태우(太瑀), 종손(從孫) 태시경(太時慶), 셋째 아들 태용(太龍), 족증손(族曾孫) 및 가동 수십 인으로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산길에서 종일토록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적이 쏜 탄환에 전사하였다. 그 후 아들, 조카, 손자 등 여러 일가들은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의 진에 가담, 모두 남원에서 함께 전사하였다. 이행연(李行淵)이 지은 행장(行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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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용담현령이었다. 『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고려 말엽 왜구가 진포(鎭浦)에 쳐들어와 여러 주군(州郡)을 약탈할 때, 현령 피원량(皮元亮)이 염군리(廉君利)·고윤덕(高允德) 등과 도모하여, 현의 남쪽에 목책을 설치하고 돌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여섯 곳에 돌을 쌓았다. 그리고 왜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돌을 내려뜨려 적을 격퇴하고자 하였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튼튼한 것을 알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드디어 물러가 버리니, 온 경내가 무사하였다”고 실려 있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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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1804. 자는 내위(乃緯), 호는 봉촌(鳳村).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후손이다. 학덕이 고상하였다. 임종 시에는 심상규(沈象奎)가 제문을 올렸고, 김달순(金達淳)과 김희순(金羲淳)이 만사를 지어 보냈다. 후손 상길(相吉)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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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수. 1905년 2월에 부임하여 1906년 12월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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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1830. 조선후기의 시인·유학자. 자는 청서(淸瑞), 호는 담락당(湛樂堂), 남원 서봉방(捿鳳坊)에서 출생. 영의정 하연(河演)의 12세손이다. 경기도 안산(安山)에서 세거했으나 후에 진안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명종 때 송구봉(宋龜峰) 등과 함께 ‘8문장’의 한 사람이던 7대조 하응림(河應臨)이 교리(校理)를 지낸 외에 증조부 하경윤(河慶潤), 조부 하한징(河漢澄), 부친 하경천(河經天) 등은 벼슬 없는 생을 보냈다. 유교정신의 규범 속에서 전범적인 사도(士道)를 지켜온 가풍은 부친 하경천의 <계자시(戒子詩)>, <효제충신예의염치음(孝悌忠信禮儀廉恥吟)>, <충효교자문(忠孝敎子文)>, <교자십삼조(敎子十三條)> 등에서도 알 수 있다. 하립은 1786년 18세 되던 해,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김일손(金馹孫)의 후손 인혁(仁赫)의 딸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결혼, 부부시인으로 해로하였다. 8년간(1788~1796) 한양에서 면학할 당시 심상규(沈象圭)의 집에서 유숙하였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박학다문의 기회가 있었으나 과거에는 실패하고, 귀향하여 부모를 시봉하였다. 청빈했던 가세를 일으키고자 1801년 12월 마령면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였다. 하립의 5형제, 즉 독락당(獨樂堂) 하호(河灝), 이락당(二樂堂) 하준(河濬), 담락당(湛樂堂) 하립, 우락당(友樂堂) 하식(河湜), 화락당(和樂堂) 하봉(河氵鳳) 등이 모두 시문에 능하였다. 이는 1791년 6월 부친의 생일에 5형제가 모두 헌송시(獻頌詩)를 지어 읊었다는 기록을 보거나, 1806년 <제만취정(題晩趣亭)>의 시제(詩題)를 놓고 5형제가 같은 운(韻)을 써서 시창작을 했던 점을 보아도 짐작할 만하다. 부인 삼의당과 결혼 첫날밤부터 시문으로 화답(和答)하였던 것도 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이다.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으나 장녀와 3녀는 일찍 사망하였다. 부부는 사후(死後)에 백운면 덕현리(德峴里) 한 무덤에 안치되었다. 문집으로 『담락당집』이 있는데, 이중에서 시집인 『담락당운집(湛樂堂韻集)』은 『담락당시집』이라는 제호로 2000년 진안문화원에서 발행하였다. 1984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가 마이산 탑영제(塔影堤) 옆에 세워졌다. →김삼의당. →담락당·삼의당 부부시비. →담락당시집.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이명래 역 『담락당시집』(진안문화원, 2000), 이월영 『삼의당 김부인 유고』(신아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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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1453. 조선 초기의 문신. 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 하자종(河自宗)의 아들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 녹사를 거쳐, 직예문 춘추관 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와 동부대언(代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히 간하는 태도를 치하하였다 한다. 세종대에 예조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42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한 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 대제학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이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벼슬을 사하였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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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태(1872~ ?) 용담군 이동면 평지리 출신의 의병. 1908년에 문태서(文泰瑞)의 호남의병단에 가입하여 박춘실(朴春實) 선봉 부대에 배속되었다.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각지에서 유격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2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 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9년 5월에 장수군 계북면 문성(文城) 동북쪽의 산중에서 함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선봉장 박춘실이 부상하여 체포되고 의병 13명이 전사하자 부대가 궤산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후 다시 호남의병단에 귀속하여 유격전을 하다가 1909년 9월 추석을 맞이하여 일시 해산하여 귀가하였는데 장수주재소의 순사가 이를 탐지하고 9월 21일에 검거되었다. 1909년 10월 8일에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1995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1997년 8월 15일에 진안군지역 독립유공자 추모사업회가 독립유공자 추모탑을 마령면 동촌리 대한이산묘 건너편에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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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79. 호는 우보(牛步). 완주군 우전면(현 구이면)에서 출생. 전주공업고등학교를 졸업, 공군사관학교 1년 수료 후 전북대학교 2년을 다니다 중간에 그만 두었다. 주천면 주양리에 이거하였는데, 주천면에 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어 있으나 무보수 교사의 확보가 어려운 것을 보고 이 고장 출신 3~4인의 동지를 규합하여 고등공민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활동했다. 1964년에 주천고등공민학교 교장을 역임, 학교는 1969년 12월 3일 중학교로 승격되었고 그곳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이래 6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68년 10월에는 한국전쟁 때 순국한 33위를 위한 대한의백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반일암(半日巖) 28경’을 발굴하고 또한 주천면에 전기 시설을 추진하였으며 반일암 꽃길 조성, 면내 체육행사 추진 등에 앞장서 주천면 일대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9년 3월 8일 지병으로 일기를 마치자 1980년 8월 30일 그의 문하생과 면민이 학교에 공적비를 세웠다. 향토문화공로상[문화공보부장관], 대한소년단 유공상[전라북도지사], 삼남교육상[전북매일신문 사장], 국민훈장 목련장[대통령], 상록수 교원상[문공부장관], 자랑스런전북인상[전라북도지사] 등을 수상.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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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72년 1월에 부임하여 1676년 12월에 이임하였다. 학문을 일으키고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송사에 막힘이 없었다고 『鎭安誌』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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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658년에 부임하여 1659년 여산현령으로 전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객사를 건립하여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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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인품이 준수하고 강개심이 있었으며 문장이 아주 능했다고 한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전기홍(全海山)·이광삼(李光三) 등과 함께 참모가 되었고, 전기홍과 함께 진중의 일을 기록하는 ‘기실(記室)’의 임무도 맡았다. 그 후 6개월 동안 여러 유격전투에서 참모로서 지략을 다하였다. 1908년 3월 21일 운현(雲峴)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 토벌대의 기습을 받아 16명과 함께 순절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tp://encykorea.aks.ac.kr/), 『전북의병사』 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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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63. 현대 진안군 출생의 교육자. 호는 월연(月淵), 통훈대부 무주현감 한경희의 후손으로 조부는 한상경(韓相璟)이고 부친은 한정희(韓正熙)이다. 안천면 출생.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애향심이 강한 선구자로서 8·15 해방 후 민족의 자주독립과 번영의 길은 오직 교육에 있음을 통감하고 1947년 대덕중학원[大德中學院: 현 안천 중학교)의 설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정병희(안천면장)가 추진위원장이 되었고 한사규와 김영호 등이 추진위원이 되어 대덕중학원 설립을 승인 받게 되었다. 한사규는 초대 학원장을 지내면서 진안지역의 중등교육기관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안천면민의 복지시설을 위해 안천시장과 우체국의 신설에도 공헌하였다. 《참고문헌》『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