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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1910. 개항기 안천면 출신의 학자. 자는 종옥(宗玉), 호는 농암(聾庵). 좌의정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의 후손으로 조부는 한석홍(韓錫洪)이고 부친은 한태영(韓泰榮)이다. 인성이 인자하였고 학문을 겸비하여 송병선(宋秉璿)과 교유하였다. 형 한상진(韓相晉) 과 함께 고향 안천면 노성리 보한(輔閒)에 ‘일경재(一經齋)’를 창설하여 후손과 고장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문헌》『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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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만성(晩惺). 안천면 노성리 출신. 한말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고향의 농토가 대부분 전주의 박규홍(朴奎洪)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박규홍과 금융조합에 호소하여 마을 사람들이 땅을 되찾게 하였다. 그 공로로 마을 사람들이 시혜비(施惠碑)를 세웠는데, 이병관(李炳觀)이 비문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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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1906. 개항기 안천면 출신의 학자. 일명 후식(厚植), 자는 덕재(德載). 좌의정 한확(韓確)의 후손이다. 동생은 한상욱(韓相旭)이다. 아들로 한광희(韓光熙), 한정희(韓正熙), 한민희(韓玟熙) 등이 있다. 학행이 뛰어났으며 송병선(宋秉璿)과 교유하였다. 동생 한상욱과 함께 일경재(一經齋)를 창설하여 후손들과 진안의 후학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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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69년 2월에 부임하여 1571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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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1845. 호는 매봉(梅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수학하였으며, 헌종 때 생원을 지냈다. ‘낙오편’을 짓고 스스로 쓴 서(→한영식의 낙오편 자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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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1년 3월에 부임하여 1913년 8월에 정읍군수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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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22년 3월에 부임하여 1724년 1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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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39년 7월에 부임하여 1842년 1월 순창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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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청여(1863.06.04.~1935.03.11.)용담군 일동면 양지리 출신 의병. 문태수(文泰洙) 의진에 가담하여 박춘실(朴春實) 선봉부대에 배속되었다. 장수군 계북면 문성동(文城洞) 뒤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1909년 5월 김준대(金俊大), 고명주(高明柱), 고원중(高元仲), 신치수(辛致守), 안왈오(安曰五), 심우상(沈尤相), 원도숙(元道淑), 조경화(趙京化), 하준태(河俊太) 등 2백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장수·용담 등 부근 촌락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문성(文城) 동북쪽의 산중에서 함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선봉장 박춘실이 부상하여 체포되고 의병 13명이 전사하자 부대가 궤산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 후 다시 호남의병단에 귀속하여 유격 활동을 하다가 1909년 9월 추석을 맞이하여 일시 해산하여 귀가하였는데 장수 주재소의 순사가 탐지하고 9월 21일에 검거되었다.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태형(笞刑) 100도를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7년 8월 15일에는 진안군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진안군지역독립유공자추모사업회가 건립한 독립유공자추모탑(→이산묘 건너편)에 명단이 올라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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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61년에 부임하여 1566년 백성이 병나면 힘써 구하고, 여러 공물창고를 잘 살피고, 재인악공의 복무연한을 10년으로 견감(蠲減)하였다.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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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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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우천(于川). 최종응(崔鍾應)이 지은 우천기(于川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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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진안군수. 1988. 6. 11 부임하여 1989. 9. 1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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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918. 자는 능천(能千), 호는 수송(秀松).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궁내부(宮內府) 주정(主政)을 지냈으며 1907년에 사재로 ‘영육학교(英育學校)’를 세웠다. 박기양(朴箕陽)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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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학자. 자는 덕명(德明), 호는 동연(東淵), 김태현(金泰鉉)의 문인이다. 약관에 사서오경을 통달하고 일찍 문명(文名)을 얻었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두문불출하였으며, 순종의 서거 시에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재배하고 상복을 입은 채 팔도강산을 유랑하였다. 10여 년 간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면서 지은 그의 시문(詩文)은 도처에서 경탄과 절찬을 받았다. 저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고, 일부를 모아 1970년 『동연집』을 출판했으며, 1977년 8월 아들 허재득(許在得)과 허재숙(許在叔)이 친필 시문을 한글로 해석하고 사진판 인쇄로 중간(重刊)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