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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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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진안군수. 1960. 11. 15 부임하여 1961. 2. 25까지 3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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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61년 8월에 부임하여 1862년 1월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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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81년에 부임하여 1883년 익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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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97. 성수면 도통리 중평에서 출생하였다. 좌도풍물 두렁쇠 가락의 상쇠로 뛰어난 기능을 보유하였으며 여러 농악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은 진안중평굿의 중심이었다. →진안중평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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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용담현령이었으나 재임연대는 미상이다. 『동국여지승람』 <용담현>편에 ‘명환(名宦)’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공민왕 때 최영(崔瑩)이 6도를 순찰하였다. 최영이 지나가는 곳에 번진(藩鎭)의 목사와 수령들이 겁을 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김봉린만이 태연하게 응대하여 온 도내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당시의 모든 지방관은 대개 1년에 두세 번 갈리고 1년을 머무는 자도 드물었는데, 김봉린은 4년간 교체되지 않아 용담(龍潭)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입었다” 《참고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관찬지리서,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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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 용담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비분하여 용담에서 창의하였다. 1908년 초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대를 편성한 다음 1909년까지 금산과 용담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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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1년 1월에 부임하여 1892년 2월 토산현감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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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 진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을 뿐 다른 인적 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후군장(後軍將)과 중군장(中軍將)으로 진안·장수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본군 뿐 아니라 친일행위를 일삼던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자위단장 및 친일관료, 일본인 상인 등 수십 명을 처단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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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1886. 자는 대지(大之), 호는 만사(晩沙).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知中樞)가 내려졌다. 이기회(李起晦)가 행장을 찬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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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75년 6월에 부임하여 1775년 11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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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1823. 조선후기의 여류시인. 김일손(金馹孫)의 후손 인혁(仁赫)의 딸로 남원 서봉방(捿鳳坊, 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출생. 삼의당(三宜堂)은 호이다. 1786년 18세 때,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하립(河氵昱 ) 과 결혼하여 부부시인으로 해로하였다. 그의 호 삼의당은 시경의 도요시(桃夭詩) ‘宜室宜家在之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시집 온 삼의당은 시부(媤父)를 비롯한 시형제 다섯이 모두 시문(詩文)에 능하였기 때문에, 엄격했던 유교 가문의 생활규범 속에서도 시작(詩作)을 하고 인정을 받았다. 혼인 첫날밤에 화답시(和答詩)로 인연을 맺은 것은 이미 규수시인으로 천부적인 문필재능을 갖추었다는 증표이며, 남편과 일상생활의 애환을 시문으로 화답하던 시우(詩友)이기도 하였다. 또한 어머니로서 삼의당은 엄한 법도로 자녀를 훈도하였으나 자정(慈情)이 넘쳤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형제와 친척까지 돌보아야 했던 고초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효심과 형제애로 가도(家道)를 세워나갔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물론 인근에서도 부도(婦道)를 칭송하였다. 가세가 빈한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1801년 12월 남원에서 마령면 방화리(訪花里)로 남편을 따라 이주하였으나 3년 뒤 시부의 상을 당하였다. 문집으로 『삼의당고(三宜堂稿)』가 있으며, 이는 1930년 오상철(吳相喆)이 교열하고 정의택(鄭義澤)이 편집하여 정일섭(丁日燮) 발행의 석판본으로 간행된 바 있다. 판본은 1950년 을유문화사 발행의 <조선역대여류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47년 김억(金億) 발행의 『이조규수한시선집』인 『금잔디』에 삼의당의 시 32수가 번역되어 있으며, 1982년 황안웅(黃安雄) 번역의 『김삼의당시문집』이 총 210면으로 제일사에서 발행되었다. 본격적으로 부부의 시를 연구한 국문학자는 박요순(朴堯順[한남대학교])이며, 논문으로 <삼의당과 그의 시 연구>가 있다. 자녀관계와 묘(墓) 등은 삼의당의 부군 하립의 항에 기재되어 있다. →담락당·삼의당 부부시비, →하립, →김삼의당고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韓南語文學(제1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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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1858. 자는 중보(重甫). 김중정(金重鼎)의 후손이다. 손자 재천(在川)이 찬하고 김창선(金昌善)이 글씨를 쓴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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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35년 4월에 부임하여 1739년 12월 임기만료. 객사를 건립하고 보민청을 다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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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이도복(李道復)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