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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1912. 자는 순경(順慶), 호는 양헌(養軒).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의 후손이며, 도정(都正) 정계순(鄭繼淳)의 손자이고 승훈랑(承訓郞) 정존도(鄭存道)의 아들이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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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개항기 진안 출신의 의병. 용담군 일서면 성암리(현 주천면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초순경에 창의 기병한 유지명의 삼남 의병대에 가담하여 약 2년 동안 용담, 고산, 금산, 은진 등지를 무대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07년 의진 30여 명이 심상의·노원섭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금산읍을 습격하여 일본인 등 12명을 살상하였고, 우편취급소와 세무서의 건물, 그리고 일본인 가옥 9동을 불태우고 양총 2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에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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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19년 8월에 부임하여 1822년 3월 도백 홍섭주가 친족이므로 상피(相避)하여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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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79년 11월에 부임하여 1585년 7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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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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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1589. 조선 중기의 문신.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다. 선조 22년에 역모자로 몰리자 자결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인은 불분명하다.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기는 하나, 이로 인해 정여립은 한국사 최초의공화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1570년(선조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뒤 은거하며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변이 있어 피신하다가 자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은 이를 부정하여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로 확대되어 천 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며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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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중국 하남(河南). 증 병조판서 정억강의 후손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가족 및 친족들과도 화목하였다. 효행은 『진안지』에 실려 있다. 1552년에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되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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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1897. 호는 청헌(淸軒).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의 후손이며, 진사(進士) 정석호(鄭碩浩)의 아들이다. 1865년에 장릉 참봉(長陵參奉)이 되었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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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550년대 이전에 재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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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822.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원지(元之).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4세손이며 정귀발(鄭貴發)의 아들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의지가 굳고 행실이 밝았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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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2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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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한말의 순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호는 소송(小松).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예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의 직에 있었다. 언로가 끊기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 있다가 경술국치의 소식을 전해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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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1803. 조선 후기 진안의 학자. 자는 원강(元綱). 조선 개국공신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의 14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의 8세손이다. 정천면 망화리에서 태어났다. 재예가 특출하고 유학에 능하였으며 효행이 남달리 뛰어나 근린의 칭송이 자자했다.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경주 정씨 이천년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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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1876.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문신. 호는 근재(根齋), 자는 춘경(春卿). 조부는 정남추(丁南樞), 부친은 정우언(丁宇彦)이다. 동향면 능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반남 박씨의 서당인 지선당(←止善堂)에서 공부하였다. 18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1858년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1865년에 가선대부에 봉해졌으며, 좌우부승지,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한국문화원연합회(http://www.kc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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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일찍이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문학과 효행이 탁월하여 송환기가 졸헌(拙軒)이라는 호를 내렸다.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1906년에 9품 종사랑(從仕郞)에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에 정려(→정재효 정려)를 받았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의 문화재』(진안문화원, 1998), 지역정보포털(http://www.oneclic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