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9~? 현대 진안 출신의 학자. 자는 덕윤(德潤), 호는 송취(松翠). 안천면 안자동 출생.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에 걸쳐 용담향교의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을 연임하였으며 1956년에 문묘를 중수하는 등 관리했다. 비록 가세는 빈한하였으나 전통적인 유가의 가풍을 이은 선비로서 유풍의 진작과 청빈의 정도로 일생을 다하였다. 그 부인 의성 정씨(義城丁氏)도 시부모 섬기기에 솔선수범하였다고 한다. 1961년 4월 진안의 사림(士林)이 진안군수 김윤철(金允喆)에게 천거하였으며, 군수 김윤철은 부인을 표창하고 다시 문교부장관에게 효행으로 천거하였다. 《참고문헌》 『원용담군지』(용담향교, 1973),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 호는 남파(南坡).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며, 허술(許述)의 아들이다. 1946년에 정읍군수를 지냈고 전주지방과장을 역임하였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을의 남쪽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허조헌(許肇憲)이 지은 남파서(南坡序)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382~1442. 자는 맹명(孟明), 호는 신암(愼菴). 시호는 공간(恭簡). 호부낭장(戶部郎將)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이며, 간숙공 허주(許周)의 아들이다. 1402년에 등과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사간원 우정언(右正言)과 형(刑)·예(禮)·병(兵) 3조(曹)의 좌랑을 지냈다. 1431년에는 대사헌에 탁용되었고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예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로 옮겼다. 1440년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의 상을 당하였고, 얼마 후 사망하였다. 조정이 공간(恭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41~1923. 자는 덕연(德淵), 호는 농은(農隱).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자는 진홍(鎭洪), 호는 석담(石潭).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김윤동(金潤東)이 지은 석담기(石潭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37~1873. 자는 인언(仁彦), 호는 간송(澗松). 자헌대부(資憲大夫)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다. 민병한(閔丙漢)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606~1677. 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학자.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 출생. 자는 능실(能實), 호는 낙재(樂齋).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후손이며, 부호군(副護軍) 허신방(許藎邦)의 아들이다. 증조부는 허필(許弼),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허기린(許其潾)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는데 특히 성리학에 매우 밝았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67년 한정유(韓挺愈)·현령 홍석(洪錫)과 협심하여 용담면 황산리에 삼천서원(←)을 창건, 안자(顔子)·주자(朱子)·정자(程子) 등 3부자(三夫子)를 향사하고 후학을 교육하였다. 유고가 있으며, 후손 허홍석(許洪錫)이 발문을 붙이고 유연근(柳淵根)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지』(진안 향교, 1924),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신종우의 인명사전(http://www.shinjongwoo.co.kr/)
  • 1835~1900. 자는 치현(致賢), 호는 경헌(敬軒),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18세손이며, 통정대부 허형(許瀅)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남달리 효행이 지극하였다. 15세 때 송래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관가에 나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후진양성과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1896년 부친이 85세로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한 후 3년간 시묘하여 성균관 등으로부터 효자의 표창도 여러 번 받았다. 수편의 한시와 유고 ‘경헌집’이 있다. 서예 또한 뛰어나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에 있는 저존재(←)의 현판글씨가 그의 글씨이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1902~1974. 일제강점기에서 제3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교육행정가이다. 안천면 삼락리 원주항 출생. 자는 일상(日祥), 호는 이산(伊山).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21세손이며, 효헌공(孝憲公) 허형(許炯)의 손자이고, 허채(許埰)의 장자이다. 1924년 ‘훈도’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면장과 교장직을 맡으면서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향리에서 지냈다. 안천면민이 세운 송덕비는 현재 망향의 동산에 옮겨 세워져 있다. 1952년 교육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새로 구성된 교육위원회에서 초대 진안군교육감으로 당선되어 3대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1952~1961) 재임하였다. 문교부가 효자·효부·열녀 등 전국에서 32명에게 표창하였는데, 그 중에 선발되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초청하여 ‘효자교육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926년 문중에서 효자상을 받았고, 1949년 안천면민과 용담향교와 중앙청, 1970년 전라북도지사에게서 효자표창장을 받았다. 딸 허노량(許盧良)은 효부로 진안군지에 등재되었다. 계부인 전덕순(全德順)은 집안을 덕화로 다스렸으며 문중에서 효부상을 받고 효부로 진안군지에 등재되었다. 아들로 영민(永敏)·종인(鍾仁)·춘(椿)·영기(永畿) 등이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1359~1440. 자는 백방(伯方)·백공(伯公), 호는 숙재(肅齋), 시호는 간숙(簡肅). 조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허윤창(許允昌)이고, 부친은 판도판서(版圖判書) 허귀룡(許貴龍)이다. 아들은 공간공(恭簡公) 허성(許誠)이고, 동생은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이다. 안천면 삼락리는 하양 허씨의 대표적인 세거지이다. 음직(蔭職: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으로 얻는 벼슬)으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여러 자리를 두루 거쳐 전법정랑(典法正郞)에 이르렀고, 지양주사(知襄州事),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 개성소윤(開城少尹), 공부총랑(工部摠郞) 등을 지냈다. 1385년 지양주사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세력의 전제(田制) 개혁에 참가하였다. 1392년 조선조에 들어서 내부경(內府卿)에 제수되었고, 인척들이 고위 관직을 점유함으로써 조선의 거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도청사(都廳使)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지형조사(知刑曹事)를 지내고 1409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올랐다. 이듬해 참지의정부사, 한성부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뒤 세종 즉위 시에는 판한성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82세를 일기로 사거하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해 공사를 분명하게 처리하였다. 가법(家法)이 엄격해 사당의 모든 행사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 행하였다. 후손들에게 “충효공검 성신화혜(忠孝恭儉 誠信和惠)”라는 유훈을 남겨 전승되고 있다. 그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은 하루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조를 내렸으며, 간숙(簡肅)의 시호가 내렸다. 김제 벽성서원, 함양 정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조선왕조실록』,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1885~1960. 일제강점기 진안출신 교육자. 안천면 삼락리 출생. 자는 광국(光國)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20세손이다.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십세조인 허이찬(許以讚)과 부친 허형(許炯)의 두 문집을 교감 발행하였고, 주항마을 앞 안자천 하류에 봉암대를 건축하였다. 1929년 용담향교 직원(현 전교)과 1930년 경성 대성문학원(현 성균관대학 전신)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부인 밀양 박씨와 같이 건강하여 1957년 3월 희귀한 회혼례를 치렀다. 배를 앓았을 때 먹는 ‘통심환’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종자를 나누어주는 등 베푸는 성품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효행과 의행에 대한 포상은 1922년 4월 ‘공부자 성적도오륜행실중간소’에게서, 그리고 1930년 경성 대성문학원장 판서 민경호(閔京鎬)에게서, 인륜복지와 사회공익에 대한 표창으로 1945년 2월 11일 조선유도회장 경학원 박상준(朴相駿)에게서, 향교전교 재임시 공적에 대한 표창으로 1929년 진안군수 주시헌(朱時憲)에게서 각각 받았다. 76세로 타계하였을 때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조객이 운집하였고,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등의 조사가 있었다. 또한 유림은 그의 행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기적비를 용담향교 경내에 건립(1984. 12. 14)하였다. 그의 부인 밀양 박씨는 효부로 천거되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53~1946. 일제강점기 진안 출신의 문인·학자. 자는 용여(用汝), 호는 금호(錦湖), 사시(私諡)는 효헌(孝憲). 자헌대부(資憲大夫)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19대손이다. 아들은 허채(許埰)이고 손자는 허정석(許正錫)이며, 송내희(宋來凞)의 문인이다. 저술로 용학강의(庸學講義), 논맹문답(論孟問答), 음률편(音律篇), 제사편(祭祀篇), 금호문집(金湖文集)(전5권) 등이 있으며, 이강(李堈)이 문집의 서를 지었다. 유현(遺賢), 효행(孝行), 거행(擧行), 문예(文藝), 유행(儒行)으로 「오륜행실록(五倫行實錄)’ 등에 등재되어 있다. 효학(孝學)으로 향도천(鄕道薦) 및 사부장관통문(四部長官通文) 등이 많다. 《참고문헌》 『진안군사』(진안군사편찬위원회, 1992),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771년 8월에 부임하여 1773년 6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59년 9월에 부임하여 1761년 9월 재임중 사망하였다.
  • 용담현령. 1727년 3월에 부임하여 1728년 4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