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許周)
운영자 23-12-18 18:44 569 hit
1359~1440. 자는 백방(伯方)·백공(伯公), 호는 숙재(肅齋), 시호는 간숙(簡肅). 조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허윤창(許允昌)이고, 부친은 판도판서(版圖判書) 허귀룡(許貴龍)이다. 아들은 공간공(恭簡公) 허성(許誠)이고, 동생은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이다. 안천면 삼락리는 하양 허씨의 대표적인 세거지이다. 음직(蔭職: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공으로 얻는 벼슬)으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여러 자리를 두루 거쳐 전법정랑(典法正郞)에 이르렀고, 지양주사(知襄州事),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 개성소윤(開城少尹), 공부총랑(工部摠郞) 등을 지냈다. 1385년 지양주사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세력의 전제(田制) 개혁에 참가하였다. 1392년 조선조에 들어서 내부경(內府卿)에 제수되었고, 인척들이 고위 관직을 점유함으로써 조선의 거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도청사(都廳使)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지형조사(知刑曹事)를 지내고 1409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올랐다. 이듬해 참지의정부사, 한성부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뒤 세종 즉위 시에는 판한성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82세를 일기로 사거하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해 공사를 분명하게 처리하였다. 가법(家法)이 엄격해 사당의 모든 행사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 행하였다. 후손들에게 “충효공검 성신화혜(忠孝恭儉 誠信和惠)”라는 유훈을 남겨 전승되고 있다. 그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은 하루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조를 내렸으며, 간숙(簡肅)의 시호가 내렸다. 김제 벽성서원, 함양 정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조선왕조실록』,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