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2~1905. 한말의 애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시호는 충정공(忠貞公). 서울 출생. 18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검역·수찬·집의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된 후 이조참판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 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하여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 1871~1910. 한말의 문신.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충청북도 괴산 출생. 1888년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와 혜민서 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를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선산에 올라가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용담현령. 1864년 3월에 부임하여 1866년 12월 김제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762년 7월에 부임하여 1766년 11월에 이임하였다.
  • 1604~168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공서(公敍). 호는 손우(遜愚) 또는 만오(晩悟).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경소(洪敬昭)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용담현령으로 1664년 5월에 부임하여 추천인 송시열이 실각하자 1668년 6월 파직되었다. 용담향교를 이건하고 삼천서원을 설립하였으며 태고정을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이 굴욕적인 항복으로 끝을 맺자 벼슬을 단념하고 태백산 춘양(春陽)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강흡(姜洽)·정양(鄭瀁)·홍우정(洪宇定)·심장세(沈長世) 등과 함께 ‘태백산오현(太白山五賢)’으로 불렸다. 김수항(金壽恒)·송시열(宋時烈)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어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를 지냈으며, 죽은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상제요록(喪祭要錄)』·『예기유회(禮記類會)』·『손우문집』 8권이 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日省錄, 遜愚文集, 藥坡漫錄.
  • 진안현감. 1897년 6월에 부임하여 1898년 3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837년 12월에 부임하여 1840년 12월 교하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818년 8월에 부임하여 1819년 8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50년 5월에 부임하여 1754년 8월 옥천으로 전임하였다.
  • 일제강점기 진안군수였다. 1913년 8월에 부임하여 1914년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848년 4월에 부임하여 1852년 12월에 이임하였다.
  • 진안현감. 1728년 8월에 부임하여 1733년 4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573년에 부임하여 1578년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용담현령. 1822년 6월에 부임하여 1825년 12월 한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생몰연대 미상.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무신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수신(黃守身)의 후예로 문장이나 문필이 대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침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進)이 경주성에서 왜적에게 기습을 받아 함락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다. 경주부윤 박이장(朴而章)과 힘을 합해 박진을 도와 왜적을 대파하고 성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부호군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 앞산에 그의 묘가 있는데, 인근 주민들은 이 산을 황정산이라 부르고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