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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백화리 출생.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황간에서 사로잡혀 왜(倭)로 압송되었다. 그의 충의에 감복한 왜인 옥리의 주선으로 환국하였다. 부인 옥천 육씨는 남편이 출정한 사이 비(婢) 천분(千分)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 중 왜병에 붙들리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황대성은 환국 이후 부인이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했다. 후에 조정에서 통정(通政)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정려를 내렸다. 정려는 안천면 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서원 앞 도로변에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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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913. 자는 진서(眞瑞), 호는 우정(藕汀).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동중추(同中樞) 황두일(黃斗一)의 아들이다. 선공감역(繕工監役)과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환벽정(環碧亭)을 지어 만년을 보냈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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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1896. 자는 치화(致化), 본관은 장수. 방촌(厖村) 희(喜)의 후손이며, 증호조참판 승언(昇彦)의 아들이다. 1884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수직이 내려졌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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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00년 9월에 부임하여 1700년 10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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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905. 호는 송재(松齋).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동규(黃東奎)의 아들이다.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 했다. 1905년에 정려가 내려졌고, 교관에 추증되었다. 김영한(金甯漢)이 지은 정려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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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하나. 호는 석정(石庭). 동학농민혁명 때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따라 동학군을 평정하는 데 종사하였다.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자 1907년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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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2년 12월에 부임하여 1893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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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877. 조선 후기 진안출신의 효자. 백운면 봉서리 출생. 자는 대규(大圭).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인수(黃仁洙)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고 학문도 깊어 지역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사문에 의해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 정려가 내렸다. 《참고문헌》『장수황씨족보을해보(長水黃氏族譜乙亥譜)』,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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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21년 10월에 부임하여 1722년 7월 재임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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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61년 4월에 부임하여 1665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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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10. 한말의 의병. 일명 준성(俊性). 백운면 오정리 출신. 대한제국군 군인으로 참령에 이르렀다. 구식군대가 해산된 후 항거활동을 하였는데, 1907년 12월 체포되어 내란죄 명목으로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流刑) 10년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의병장 강성택(姜成宅)과 상의하여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 강성택 휘하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완도·해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다음 달인 7월 추공엽(秋珙燁)·황두일(黃斗一)의 의병부대와 합류, 대장으로 추대되어 휘하의 의병 150여 명으로 부대를 정비하였다. 완도에서 4개리의 이장을 소집하여 의병자금을 모집하고, 해남에서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의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대둔사(大屯寺)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야습을 받아 의병부대가 해체되고, 숨어 지내다가 1909년 12월 붙잡혔다. 1910년 2월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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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안천면에 세거한 문신.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안천면에 세거하는 장수 황씨의 입향조로 알려졌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하지만 문과에 급제하였거나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벼슬은 음직으로 나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황징은 원래 경상도 상주(尙州)에서 살다가 1550년에 진안군 이북면 이곡리(현 안천면 백화리 상리)에 옮겨 살게 되는데 그곳에 처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산서원에 황희의 초상과 함께 황보신(黃保身)·황징(黃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진안군청(http://eupmyeon.jinan.go.kr/),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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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48. 3․1만세운동의 선봉. 임실 출생.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 등과 3·1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오수리 장터에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다. 둔남면사무소에서 면장, 면서기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가서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어 4월 6일에는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泳) 등과 인근 주민 수백 명을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는데, 이 때 황해수는 적에게 끌려가면서도 늠름한 기색으로 주민을 격려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대통령표창(1977)·건국훈장 애족장(1990)을 추서하였다. →삼일운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독립운동사 자료집』 3 (국가 보훈처),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전북의병사』 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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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1452.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안천면 백화리에 세거하고 있는 후손들이 안천면 백화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배향했다. 13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1394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형조·예조·이조의 정랑, 우사간대부·승정원지신사를 지냈으며, 1408년 민씨(閔氏) 일파의 횡포를 제거한 뒤 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지냈으나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14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출이 불가함을 건의하다가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복관되어 좌의정에 올랐다가 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449년 치사(致仕: 스스로 벼슬을 물러남)한 뒤에도 계속 세종의 자문에 응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농사 개량과 예법 개정 등의 치적을 쌓았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으며,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翼成).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