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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28년 8월에 부임하여 1733년 4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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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573년에 부임하여 1578년 임기만료로 체임된 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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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822년 6월에 부임하여 1825년 12월 한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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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연대 미상.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무신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수신(黃守身)의 후예로 문장이나 문필이 대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침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進)이 경주성에서 왜적에게 기습을 받아 함락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다. 경주부윤 박이장(朴而章)과 힘을 합해 박진을 도와 왜적을 대파하고 성을 탈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부호군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상전면 구룡리 세동마을 앞산에 그의 묘가 있는데, 인근 주민들은 이 산을 황정산이라 부르고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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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백화리 출생.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황간에서 사로잡혀 왜(倭)로 압송되었다. 그의 충의에 감복한 왜인 옥리의 주선으로 환국하였다. 부인 옥천 육씨는 남편이 출정한 사이 비(婢) 천분(千分)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 중 왜병에 붙들리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황대성은 환국 이후 부인이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했다. 후에 조정에서 통정(通政)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정려를 내렸다. 정려는 안천면 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서원 앞 도로변에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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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913. 자는 진서(眞瑞), 호는 우정(藕汀). 영의정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동중추(同中樞) 황두일(黃斗一)의 아들이다. 선공감역(繕工監役)과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환벽정(環碧亭)을 지어 만년을 보냈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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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1896. 자는 치화(致化), 본관은 장수. 방촌(厖村) 희(喜)의 후손이며, 증호조참판 승언(昇彦)의 아들이다. 1884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수직이 내려졌다. 이용직(李容稙)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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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00년 9월에 부임하여 1700년 10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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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905. 호는 송재(松齋).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동규(黃東奎)의 아들이다.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 했다. 1905년에 정려가 내려졌고, 교관에 추증되었다. 김영한(金甯漢)이 지은 정려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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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하나. 호는 석정(石庭). 동학농민혁명 때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따라 동학군을 평정하는 데 종사하였다.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자 1907년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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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92년 12월에 부임하여 1893년 2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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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877. 조선 후기 진안출신의 효자. 백운면 봉서리 출생. 자는 대규(大圭). 황희(黃喜)의 후손이며 황인수(黃仁洙)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고 학문도 깊어 지역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사문에 의해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 정려가 내렸다. 《참고문헌》『장수황씨족보을해보(長水黃氏族譜乙亥譜)』,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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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21년 10월에 부임하여 1722년 7월 재임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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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61년 4월에 부임하여 1665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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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1910. 한말의 의병. 일명 준성(俊性). 백운면 오정리(지금 백운면 남계리) 출신. 대한제국군 군인으로 참령에 이르렀다. 구식군대가 해산된 후 항거활동을 하였는데, 1907년 12월 체포되어 내란죄 명목으로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流刑) 10년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의병장 강성택(姜成宅)과 상의하여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 강성택 휘하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완도·해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다음 달인 7월 추공엽(秋珙燁)·황두일(黃斗一)의 의병부대와 합류, 대장으로 추대되어 휘하의 의병 150여 명으로 부대를 정비하였다. 완도에서 4개리의 이장을 소집하여 의병자금을 모집하고, 해남에서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의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대둔사(大屯寺)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야습을 받아 의병부대가 해체되고, 숨어 지내다가 1909년 12월 붙잡혔다. 1910년 2월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