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3~1452.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안천면 백화리에 세거하고 있는 후손들이 안천면 백화리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배향했다. 13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1394년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형조·예조·이조의 정랑, 우사간대부·승정원지신사를 지냈으며, 1408년 민씨(閔氏) 일파의 횡포를 제거한 뒤 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지냈으나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14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출이 불가함을 건의하다가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복관되어 좌의정에 올랐다가 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449년 치사(致仕: 스스로 벼슬을 물러남)한 뒤에도 계속 세종의 자문에 응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농사 개량과 예법 개정 등의 치적을 쌓았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으며,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성(翼成).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