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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910. 한말의 문신, 항일 우국지사.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 1860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사과(司果),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홍문관의 관직을 지내고, 지평(持平), 장령(掌令), 사성(司成), 사간(司諫) 등 청직(淸職)에 있다가 호조, 형조, 병조, 이조의 참의에 이어 한성부의 좌·우윤 및 호조, 이조, 형조, 공조의 참판, 형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광주부 유수와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듬해 1월 22일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하였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자 “이지용(李址鎔) 등의 매국노와 같이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恩賜金)’을 주었는데 그에게도 ‘남작’의 작위를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를 치욕으로 느끼고 1910년 9월 8일 미리 사두었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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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681년 9월에 부임하여 1686년 4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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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시대 명현 40위 중 한 분. 자는 이원(而遠), 호는 취수당(醉睡堂). 계림군(鷄林君) 김균(稛)의 후예로 김경명(金鏡明)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1601년에 사마(司馬)에 올라 음사(蔭仕)로 재랑(齋郞)의 직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대에 둘째 아들 입원(立元), 홍백석(洪百石) 등으로 하여금 혼탕한 조정에 상소를 올려 실정(失政)의 회복을 간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하옥 당하였다. 당(堂)과 정자를 지어 ‘취수당(醉睡堂)’, ‘월파정(月波亭)’이라 이름하고 이경석(李景奭), 김수현(金壽賢) 등과 음풍농월로 만년을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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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의병. 진안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다. 1907년 9월 12일 결성된 호남 의진의 중군장이 되었는데 후에 선봉장을 대행하였다. 1908년 3월 5일 의병장 이석용의 명을 받아 진안 시동(矢洞)에 출병한 일본군 토벌대를 습격하여 왜병 1명을 총살하는 등, 그 후 유격전에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3월 6일 호남의진이 해산한 뒤 그의 종적은 전해진 바가 없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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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1592]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의병. 호는 연재(連齋). 고조는 병조판서 김만서(金晩緖)이고 의병 활동에 동참하여 순절한 김정(金精)이 동생이며, 아들로는 김원룡(金元龍), 김형룡(金亨龍), 김이룡(金利龍) 등이 있다.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성혼(成渾)은 그의 학문이 뛰어남을 인정하여 먼 친척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라도 역시 6월 중순 경 무주와 금산이 함락된 데 이어 진안이 점령당하면서 호남의 지휘부인 전주부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싸움이 바로 웅치(熊峙) 전투였다. 당시 김수는 김정을 비롯한 가솔을 이끌고 김제 군수 정담(鄭湛)의 관군과 함께 웅치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다. 6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7월 8일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과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순절하였다. 김수·김정 형제의 헌액(軒額)에 율곡 이이가 쓴 서(序)가 있다고 사천 김씨의 보첩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의 맥(鎭安의 脈)』(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82),『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하태규 「임란에 있어 웅치전의 위상에 대하여-호남 방어와 관련하여-」(『전라문화논총』 5,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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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13년 8월에 부임하여 1815년 9월 남원현감과 자리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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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879년 6월에 부임하여 1881년 4월 청도로 전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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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현감. 1733년 5월에 부임하여 1737년 8월에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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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현령. 1746년 5월에 부임하여 1751년 2월 임기만료 체임. 군청을 창설하고, 백성들로부터 호미를 걷거나 부역을 과하는 일에 임기응변이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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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암우(1887~?) 한말의 의병. 진안군 일서면(성수면) 내동리 출신이다. 1907년 음력 12월 15일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 20여 명과 함께 임실(任實) 군내에서 일본군 수비대, 일진회(一進會) 회원, 자위단장, 친일관료, 일본인 상인 등 다수를 처단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던 중 피체되어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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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진안군수. 1973. 6. 5 부임하여 1973. 12. 29까지 5개월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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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1751. 자는 진보(震輔). 자헌대부 경연 참찬관을 지냈다. 김중정(金重鼎)의 증손이다. 5대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재석(在錫)이 찬하고, 5대손 재철(在哲)이 글씨를 쓴 묘표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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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65. 주천면 주양리 출생의 의인(義人). 평소에 마음씨가 곱기로 소문이 났으며 어린이를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들의 벗이 되었고, 자기의 자녀처럼 귀여워 해주어 어린이들도 그를 ‘혹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랐다. 1965년 12월 28일 주양리 와룡소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세 어린이들이 얼음이 깨지면서 익사 직전에 있음을 보고, 옷을 입은 채 뛰어들어 2명을 구하고 1명을 또 구하려다 익사하였다. 청소년 적십자사 단원이 기금을 모아 순의비를 세웠으며, 1968년 새싹회에서 ‘소파상’에 추서하였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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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이산(梨山), 이정하(李鼎夏)가 서를 쓴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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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진안군수. 1962. 4. 6 부임하여 1963. 1. 1 까지 9개월간 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