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2~1592]조선 중기 진안 출신의 의병. 호는 연재(連齋). 고조는 병조판서 김만서(金晩緖)이고 의병 활동에 동참하여 순절한 김정(金精)이 동생이며, 아들로는 김원룡(金元龍), 김형룡(金亨龍), 김이룡(金利龍) 등이 있다.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성혼(成渾)은 그의 학문이 뛰어남을 인정하여 먼 친척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라도 역시 6월 중순 경 무주와 금산이 함락된 데 이어 진안이 점령당하면서 호남의 지휘부인 전주부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싸움이 바로 웅치(熊峙) 전투였다. 당시 김수는 김정을 비롯한 가솔을 이끌고 김제 군수 정담(鄭湛)의 관군과 함께 웅치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다. 6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7월 8일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과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순절하였다. 김수·김정 형제의 헌액(軒額)에 율곡 이이가 쓴 서(序)가 있다고 사천 김씨의 보첩에 실려 있다. 《참고문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진안의 맥(鎭安의 脈)』(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82),『진안군사』(진안군사 편찬위원회, 1992), 하태규 「임란에 있어 웅치전의 위상에 대하여-호남 방어와 관련하여-」(『전라문화논총』 5,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