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현감. 1876년 1월에 부임하여 1876년 8월에 이임하였다.
  • 1923~1981. 현대 체육인.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서 출생, 1926년 13세 때 부모와 같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하였다. 1944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해방 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금융계에 투신하였고, 야구계에 진출하여 국가대표팀 선수(포수, 4번타자), 코치, 감독과 농협팀 감독을 지낸 야구의 선구자로 한국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33대 진안군수. 1982. 9. 18 부임하여 1984. 11. 10까지 2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 1896~1975. 한말의 독립운동가. 김중정(金重鼎)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김대현(金大鉉)이다. 호는 달중(達中), 주천면 출생. 6살 때 김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2살 때에는 화동학교(華東學校, 현 주천초등학교 전신)에서 수학한 뒤 모교에서 후배를 교육하였다. 경술국치의 통한을 달래며 후학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고 개화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독립선언문을 무주·진안·장수 등지에 배포하고 4월 3일에는 김주한(金周漢), 양해관(梁海寬) 등과 함께 주민 200여 명을 주천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아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때로는 면사무소를 습격, 등사기를 훔쳐 문서를 등사하고 주재소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0년에는 일본에 잠입하여 유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납치되었으나 탈출하였다. 1977년 12월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사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일제하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35년 이전에 재임하였다.
  • 김옥현(1878∼1907.12.21.) 한말의 의병. 진안 출신으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1907년 진안에서 창의, 동지 7명을 이끌고 진안·용담·장수의 산간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7년 12월 장수군 천천면에서 동료 의병 6명과 함께 군수금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 헌병에게 피체되어 유치되었다. 같은 해 12월 21일, 그를 구출하려고 동료 의병 20여 명이 장수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였는데 그 와중에 피살, 순국하였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진안지역 근현대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진안현감. 1889년 7월에 부임하여 1890년 12월 군위현감으로 전임하였다.
  • ?~1918. 전라남도 영광 출신. 한말의 의병장.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유성(有聲), 호는 후은(後隱).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켜 11일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 등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였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 명을 포살하였다. 9월 24일 장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하고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외아들 기봉(起鳳)이 합류하였으나 흥덕 안치(安峙)에서 전사하였다.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았는데, 며칠 뒤 기삼연은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하였고,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과 보병 등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대덕리와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한 후 무장 와공면에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 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많은 문헌 중 의병 활동에 관한 『의소일기(義所日記)』만이 전하는데 의소일기는 『독립운동사 자료집1』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1876~1941. 남학(南學),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포교하던 김광화(金光華)의 뒤를 이은 금강불교(←金剛佛敎)의 창시자. 주천면 대불리 태생이며 호는 명봉(明奉)이다. 1895년 오방불교(五方佛敎)의 교주인 김광화가 전주에서 처형당하자(을미횡액), 그와 함께 투옥되었던 김용배는 “내가 김광화의 선야동 수도장에 최초로 입도한 창교(創敎) 제자이며 교통(敎統)은 나에게 전승되었다”고 주장하며 가까운 교인인 이기만·최용준·장인근 등을 거느리고 ‘금강불교’라는 교명을 내세웠다. 이로써 오방불교는 분열되었다. 김용배는 그 뒤 마이산 정명암(←正明庵)에 광제회(廣濟會)를 열어 설법포교하고, 1923년에는 명암(明岩) 아래에 팔정사(八淨寺)를 지어 을미횡액에 순교한 8인을 제사지냈다. 그는 교주 김광화의 법언록 상·하권을 편집하고 운장산·마이산 등 명산에 제단을 설치하여 기도에 주력하였다. 산제기도의 대상은 북두칠성(‘대성북두칠원성군’이라 함)과 산왕(‘산왕불’이라 함)을 주로 하여 ‘광화교주자씨(光華敎主慈氏)’, ‘미륵존불’, ‘아미타불’, ‘삼존천위’, ‘화무상제’, ‘관성제군’ 등 제불·제천신명이었다. 기도의 목적은 속죄와 해탈, 소원성취, 보제중생, ‘주상전하 성수만세’를 비는 것이었다. 1927년 김용배가 운장산 독제봉 위에서 지낸 대규모의 제사를 보면, 헌관집사가 11명, 동·서·중의 순서로 헌작한 신도 수가 43명이었고 그 기도 내용은 국왕으로부터 문무백관 및 도·군의 임관들까지의 태평을 비는 위국축문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光華金處士法言錄(정명암, 1924), 舊韓末 南學의 發生과 그 性格에 관하여(李康五, 全羅文化硏究 創刊號, 全北鄕土文化硏究會, 1979)
  • 1842~? 호는 성재(誠齋).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숭선(崇善)의 후손으로 무과로 군수에 이르렀다. 4개 군에서 수령을 지냈으며 선행을 잘 하고 학문을 가까이 하였다. 용담군수 재임 시 향교를 보수하였고 학교를 세웠으며, 의연금 1천여 원을 내놓아 주천면 반일암의 돌을 뚫어서 길을 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향교, 1925)
  • 1879∼1929. 개항기 진안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이석용의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9월 25일부터 이석용을 도와 임실군·장수군·남원시·함평군 등지에서 약 1년 반 동안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핵심 부장들의 전몰과 군비 및 인원의 열세로 인하여 의병 진영이 해산되는 상황 속에서도 김운서는 계속하여 남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이석용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다. 1912년 10월 22일 박보국·김필수 등과 함께 남원군 내진전면[현 장수군 산서면] 면사무소를 공격, 의병 자금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12월 17일에는 임실군 남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8(국가보훈처, 1990),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용담현령. 1695년 3월에 부임하여 1696년 6월 파직되었다.
  • 진안현감. 1716년 8월에 부임하여 1716년 12월 수찬으로 전임하였다.
  • 이도복(李道復)이 지은 만오당기(晩悟堂記)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847년 7월에 부임하여 1850년 5월 옥천으로 전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