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구(金容球)
운영자 23-12-18 18:44 576 hit
?~1918. 전라남도 영광 출신. 한말의 의병장.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유성(有聲), 호는 후은(後隱).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7년 8월 8일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에서 의병을 일으켜 11일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 등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였다. 9월 6일 적 20명과 연곡사(蓮谷寺)에서 접전하여 10여 명을 포살하였다. 9월 24일 장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구성하여 기우만을 맹주로 추대하고 도통령(都統領)이 되어 장성·함평·영광·고창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외아들 기봉(起鳳)이 합류하였으나 흥덕 안치(安峙)에서 전사하였다. 대장 기삼연의 발 부상으로 순창에서 군 통수권을 위임받았는데, 며칠 뒤 기삼연은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하였고, 구수산(九岫山)에서 적의 기병과 보병 등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대덕리와 무장 선운사에서 접전한 후 무장 와공면에 머무르던 중 적의 기습에 맞서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고산으로 후퇴, 방장산(方丈山)에 머물렀다. 정신이 계속 혼미하자, 군 통수권을 박도경(朴道京)에게 위임한 뒤 장성 백암산(白巖山)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많은 문헌 중 의병 활동에 관한 『의소일기(義所日記)』만이 전하는데 의소일기는 『독립운동사 자료집1』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