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배(金庸培)
운영자 23-12-18 18:44 579 hit
1876~1941. 남학(南學),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포교하던 김광화(金光華)의 뒤를 이은 금강불교(←金剛佛敎)의 창시자. 주천면 대불리 태생이며 호는 명봉(明奉)이다. 1895년 오방불교(五方佛敎)의 교주인 김광화가 전주에서 처형당하자(을미횡액), 그와 함께 투옥되었던 김용배는 “내가 김광화의 선야동 수도장에 최초로 입도한 창교(創敎) 제자이며 교통(敎統)은 나에게 전승되었다”고 주장하며 가까운 교인인 이기만·최용준·장인근 등을 거느리고 ‘금강불교’라는 교명을 내세웠다. 이로써 오방불교는 분열되었다. 김용배는 그 뒤 마이산 정명암(←正明庵)에 광제회(廣濟會)를 열어 설법포교하고, 1923년에는 명암(明岩) 아래에 팔정사(八淨寺)를 지어 을미횡액에 순교한 8인을 제사지냈다. 그는 교주 김광화의 법언록 상·하권을 편집하고 운장산·마이산 등 명산에 제단을 설치하여 기도에 주력하였다. 산제기도의 대상은 북두칠성(‘대성북두칠원성군’이라 함)과 산왕(‘산왕불’이라 함)을 주로 하여 ‘광화교주자씨(光華敎主慈氏)’, ‘미륵존불’, ‘아미타불’, ‘삼존천위’, ‘화무상제’, ‘관성제군’ 등 제불·제천신명이었다. 기도의 목적은 속죄와 해탈, 소원성취, 보제중생, ‘주상전하 성수만세’를 비는 것이었다. 1927년 김용배가 운장산 독제봉 위에서 지낸 대규모의 제사를 보면, 헌관집사가 11명, 동·서·중의 순서로 헌작한 신도 수가 43명이었고 그 기도 내용은 국왕으로부터 문무백관 및 도·군의 임관들까지의 태평을 비는 위국축문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光華金處士法言錄(정명암, 1924), 舊韓末 南學의 發生과 그 性格에 관하여(李康五, 全羅文化硏究 創刊號, 全北鄕土文化硏究會,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