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대 진안군수. 1961. 3. 21 부임하여 1961. 7. 21까지 4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797년 11월에 부임하여 1800년 8월 덕천현령으로 영전하였다.
  • [189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석락(錫洛). 판서 김충유(金冲裕)의 후손이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의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백일 또는 삼칠일[21일] 기도를 하는 등 오랜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뜻을 같이하는 7~8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7척의 넓은 베에 크게 쓴 기(旗)를 만들었으며, 나팔과 큰 칼 및 쇠창 등의 무기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또한 천문지(天文誌)와 지도(地圖) 또는 음양진(陰陽陣)과 문무도(文武鞱) 등의 병서(兵書)를 연구하는 등 독립운동의 뜻을 세웠다. 그러나 1938년 봄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간 고초를 당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으나 남북으로 분열되니, 백마산(白馬山)에 한 칸의 흙집을 짓고 민족 통일과 평화를 밤낮으로 기원하였다. 이성렬(李成烈)이 찬한 행장이 있다.《참고문헌》 『고사인 김공이신 실행(故士人金公利信實行)』,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진안현감. 1646년 3월에 부임하였으나 1646년 5월부터 진안현을 10년간 폐하고 장수현에 속하도록 하였다.
  • 1851~1907.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의병장. 대한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된 34위 중 한 분. 자는 봉거(鳳擧). 1896년 의병의 격문이 돌자, 포사(砲士)들을 끌어 들여 전라남도 금성·광산 지역에서 거의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뒤 기삼연(奇參衍)이 의거를 서두르자, 포사와 보부상들이 의병항쟁에 가담하도록 주선하였다. 1907년 9월 장성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가 결성되자, 종사(從事)가 되었다. 장성과 영광 등지에서 순사 주재소, 일본인의 상점, 일진회(一進會)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그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야습해 온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북문루(北門樓)에서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大韓駬山廟誌』(진안문화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자는 윤삼(允三), 호는 야은(野隱).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며 통정대부였다. 아들 희순(羲淳)과 더불어 뛰어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판서 김종한(金宗漢)이 찬한 효행비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920~1988. 현대 진안 출신의 종교인. 천주교 신부로 제5대 전주교구장을 지낸 인물이다.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수면 중길리 24번지에서 태어났다. 1935년 마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진학, 1941년 졸업하였다. 현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편성된 5년제였는데,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는 신부가 되려고 다니는 소신학교였다. 이어 성유스티노대 신학교와 덕원 성분도대 신학교를 거쳐 1947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을 졸업함과 동시에 전주교구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전주 대동 본당, 전라북도 화산 본당, 김제 본당, 군산 본당, 전주 중앙 본당 등의 주임 신부를 역임하였다. 1961년 전주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1962년 전주교구장 한공렬 주교의 수행원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다. 1966년 이리[현 익산] 본당 주임 신부, 1972년 전주교구 부교구장 겸 상서국장을 거쳐 1973년 2월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3월 19일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 후 주교회의 상임위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78년과 1980년 2차에 걸쳐 로마교황청을 방문한 다음 유럽을 순방하였다. 1981년 4월 10일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참고문헌》 『가톨릭대사전』,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鎭安郡史(진안군, 1992)
  • 김재문(1886~?)은 용담군 일동면 하신동(下新洞) 출신이다. 그는 1908년초에 호 남의병단에 가입하여 약 1년 동안 무주, 장수, 안의 동지에서 유격 활동에 참가했다가 1909년 4월에 체포되어 전주 재판부에서 10년 형을 받고 복역 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7대 진안군수. 1950. 7. 23 부임하여 1954. 2. 9까지 3년 7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797년 7월에 부임하여 1797년 11월 파직되었다.
  • 1785~1854. 초명은 유황(有璜).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부친 김응철(金應喆)과 더불어 효성이 뛰어나 사림에서 천거하였다. 이병은(李炳殷)이 찬한 기적비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544∼1592. 진안 출신의 임진왜란 때 의병. 호는 죽곡(竹谷). 고조가 병조판서 김만서(金晩緖)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무주를 거쳐 금산, 진안까지 점령하고 용담·진안을 친 다음 웅치를 넘어서 전주를 침공하려 하였다. 이에 김정은 형 김수(金粹)와 함께 가동(家僮)과 의병을 모아서 전주를 공략하려는 왜군을 맞아 싸우다 웅치 건지봉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형이 먼저 진 하나를 돌파하여 적 둘의 목을 베고 병졸 수 십 명을 죽였으나 총탄과 창이 그의 몸에 어지럽게 가해져 전사하였다. 웅치 전투에서는 김정 형제뿐만 아니라 김수의 아들 김이룡(金利龍)과 김정의 아들 김인룡(金仁龍)과 김의룡(金義龍), 동생 서(糈)의 아들 김익룡(金翼龍), 종제 김당(金糖)과 그의 아들 김경룡(金景龍)도 함께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진안문화원, 2004), 鎭安郡史(진안군, 1992)
  • 용담현령. 1734년 1월에 부임하여 1735년 2월 재임 중 사망하였다.
  •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할아버지는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역임한 김현택(金顯澤)이고, 아버지는 효자로 정려되고 동몽교관에 증직된 김학배(金鶴培)이다. 성수면 좌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돈독하였고,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887년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1904년 기우만이 정려기를 찬하였으며 성수면 좌포리에 정려각이 있다. 《참고문헌》
  • 자는 이숙(理淑). 호는 난곡(蘭谷). 참판 김효남(金孝男)의 후손이다. 공겸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박성양(朴性陽)과 전우(田愚)의 문중에 어울렸다. 문명이 세상에 떨쳤으며 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