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1~1934. 초명은 필의(弼儀), 자는 화윤(和允), 해사(海沙)는 자호이다.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이다. 이도복(李道復)과 교유하였으며, 이도복이 지은 해사당기(海沙堂記)가 전한다. 정귀영(鄭貴泳)이 찬한 행장이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1882~1959. 일명 재한(載漢). 일제강점기 진안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금산군 남면 마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주천면 화동학교 교정 등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당하여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삼일운동과 진안 《참고문헌》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91),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판결문[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1868~1893. 조선 후기 진안지역의 학자. 자는 군필(君弼), 호는 이존재(二存齋). 김충한(金沖漢)의 18세손이다. 성수면 중길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문예가 숙성하고 문학으로 유명하여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부인 광산 김씨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시부모를 모심에 예를 다 하였다. 《참고문헌》 『경주 김씨 유사(慶州金氏遺事)』,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한말의 의병(1891-?) 용담군 이동면 하행원리(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하향마을) 출신이다. 1908년 초 문태수가 지휘하는 호남의병단에 가입한 후 박춘실(朴春實)의 선봉 부대에 배속되어, 덕유산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유격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909년 9월 동료의병 20명과 함께 검거되어 10월 8일 전주재판부에서 태(笞) 100도를 맞고 풀려났다. 2015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다.
  • 진안군지역구 출신 제2대 국회의원. 일본 고오베상고(神戶商高)를 나와 한국청년단 진안군단장 국민당중앙위원을 지냈으며 당선 뒤에는 자유당에 입당했으나 ‘족청계(조선민족청년단 출신 자유당원)’로 몰려 제명되었다가 다시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가 중도사퇴하였다.
  • 1602~1661. 조선 중후기 진안에 거주하였던 문신.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긍구당(肯構堂). 김겸광(金謙光)의 후손으로 조부는 김충립(金忠立)이다. 서울 황화방(皇華坊)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636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치욕적인 항복으로 끝나자 친명파[척화파]의 한 사람으로 사림에 묻힐 각오로 조부 김충립과 함께 은거하였다. 한때 충청남도 연산에 머물다가 1637년에 용담현의 주자천(朱子川) 변의 아름다운 고장 주천면으로 이주하였다. 1654년에 강당을 지어 와룡암(臥龍庵)이라 편액한 후 낙향의 한을 시와 거문고로 달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만년을 보냈다. 저술로는 『긍구당 유고(肯構堂遺稿←)』가 있다. 박성양이 비문을 쓴 묘비가 있다. 1924년 주천면 주양리의 주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긍구당 유고(肯構堂遺稿)』,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鎭安郡史
  • 진안현감. 1811년 1월에 부임하여 1813년 7월 부사로 전임하였다.
  • 진안현감. 1872년 9월에 부임하여 1874년 11월에 이임하였다.
  • 용담현령. 1717년 9월에 부임하여 1718년 12월 이임하였다.
  • (1864~1907.12.) 진안출신의병, 1907년 음력 9월 이석용의병장이 전북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안읍에 있는 경무분파소(警務分派所)와 우편국 등을 공격할 때 의병의 길 안내를 맡아 이석용의진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의병 참여를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7년 12월 1일 진안수비대에 체포되었다. 1907년 12월 2~3일 사이에 신문을 받다가 일본 헌병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 20대 진안군수. 1964. 6. 25 부임하여 1967. 12. 1까지 3년 6개월간 재임하였다.
  • 용담현령. 1704년 4월에 부임하여 1707년 12월 여산현령으로 영전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판서 김거익(金居翼)의 후손이며, 김준팔(金俊八)의 아들이다. 벼슬은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각비(孝閣碑)가 세워졌는데, 이기손(李起巽)이 찬한 음기가 있다. 《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김치삼(1872∼1909.09)은 용담군 일서면 성암리(진안군 주천면 신양리 성암마을)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초순경에 창의 기병한 유지명(柳志明)이 영솔하는 삼 남의병대에 가입하여 약 2년간 용담, 금산(錦山), 은진(恩津) 동지를 잠행 하면서 유격 활동에 앞장 섰다. 특히 1907년 10월 3일 밤에 그의 의진 30 여명이 심상의(沈相諱)와 노원섭(盧元燮)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금산읍을 습격하였을 때는 동지 정성일(丁成一) 둥과 함께 선두에서 분전한 결과 일본안 대석로구(大石口夕) 외 2명을 죽이고 충시모(沖〉壬) 외 7명과 일 본에 아부하는 한국인 1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우편취급소와 세무서의 건물 그리고 일본인 가옥 9동을 불태우고 양총 2정과 탄환 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에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7월 2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모살·강도죄 및 방화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8월 2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고 동년 9월 14일 대심원에서 상고가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재판 기록에는 용담읍을 습격한 것으로 기재되 어 있으나 다른 재판 기록으로 보아 금산읍을 오기한 것 같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병활동과 진안 《참고문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9(국가보훈처, 1991), 『전북 진안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학술 보고서』(진안문화원, 2003)
  • ⇒김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