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리(상전) 九龍里(上田) 상전면 북동단에 위치하는 면적 5.16㎢인 법정리. 금당·세동 등 2개 행정리가 소재하며 모두 43세대, 59명(남28·여31)이 거주한다.(2023.9.30.현재)
【형성 및 변천】 한말(韓末) 용담군 이남면(二南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세동(元細洞), 불로치(不老峙), 비대리(鼻大里) 등을 묶어 진안군 정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상전면에 편입되었다. 용담댐으로 모든 마을이 수몰되었으나 금당마을과 세동마을을 불로티령 기슭에 새로 조성하였다.
【리명유래】 구렁들을 끼고 이루어진 마을이므로 음을 취해 한자로 구룡(九龍)이라 하였다.
【자연환경】 고산 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져 불당골재를 경계로 하여 안천면 신괴리와 접경하고, 이 산등성이가 더 북진하여 대양밭재 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안천면 노성리와 접경한다. 서쪽은 금강이 휘돌아나가는 곳이라 동고서저형의 지세였다. 서쪽은 예전 금강을 경계로 하여 같은 면 용평리와 접경하였으나 지금은 용담댐 담수로 경계를 가늠하기 어렵다. 북쪽은 고산 줄기가 서쪽으로 휘어진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정천면 망화리와 접경하고, 남쪽은 고산 줄기가 사창산을 이루고 뻗어내린 산등성이를 경계로 하여 같은 면 월포리와 남북으로 접경한다.
【교통】 국도 30호선(진무로)이 용평대교를 거쳐 불로치터널을 지나 안천면과 연결되는데, 면도가 각 마을을 이어주고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정천면 망화리 지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금당마을은 용담댐으로 수몰된 후 호안(湖岸)에 새로운 마을로 조성되었다. 세동마을은 마을이 가늘고 길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용담댐으로 수몰된 후 이주민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이다. 수몰 이전에는 세동, 불로티, 코크니[금당] 마을이 있었다.
【산업】 경제활동은 농업이나 경작규모는 매우 영세하다. 귀촌인도 많다.
【유물·유적】 이 법정리에는 다음의 유물·유적이 소재하는 바 그 위치는 리 지도에 표기되고, 설명은 관내 마을항목 또는 표제항목에 실려 있음. ❶ 세동유물산포지A, ❷ 세동유물산포지B.
리 지명 보기
【구룡리 지명】 상전면 가능골[세동]
【마을】 불로티 남서쪽에 있던 마을. 좁은 골짜기에 이루어졌음. 옛 마을 부근에 새로 조성하여 세동이라 함. →세동 감나뭇골[시목동]
【마을】 비대 동남쪽에 있던 마을. 감나무가 많이 있음. 거늠산
【산】 세동 남쪽에 있는 산. 거재나뭇들
【들】 대양치 서남쪽에 있던 들. 공동묘지
【묘】 불로티 북쪽에 있던 공동묘지. 구렁들[구룡평]
【들】 구룡리를 이루고 있던 들. 불로티와 코크니 사이의 구렁으로 이루어졌음. 구룡교(九龍橋)
【다리】 세동 남쪽에 있던 다리. 구룡지(九龍池)
【못】 →불로티방죽. 구룡평(九龍坪)
【들】 →구렁들. 구미방죽[九尾堤]
【못】 →불로티방죽. 구수배미
【논】 불로티 앞(서)쪽에 있던 논. 금당(金塘)
【행정리】 본디 코크니 또는 비대(鼻大)라 하였으나 주민들이 싫어하여 마을 앞에 방죽이 있어 금당이라 하였기에 금당(金塘)으로 고침. 용담호로 수몰되어 옛 마을터 위쪽에 새로 마을을 조성함. 금당길
【도로명】 구룡리 금당 마을길의 신 도로명. 기암(機岩)
【바위】 →베틀바우. 깎음골
【골】 세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넙덕골
【골】 구룡리 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복동(多福洞)
【마을】 →따박골. 당골절
【절】 대밭골 북쪽에 있던 암자. 대밭골
【골】 구룡리에 있는 골짜기. 당골절이 있었음. 대양치[비대재]
【고개】 비대에서 안천면 노성리 대양으로 넘어가는 고개. 된살목재
【고개】 세동 동남쪽에서 안천면 신괴리 지새로 넘어가는 고개. 뒤목골
【골】 가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따박골[다복동]
【마을】 구룡리에 있던 마을. 따박솔(다복솔)이 있었음. 망덕거리
【들】 세동 서쪽 길 주위에 있던 들. 멍에배미
【논】 비대 앞(남)쪽에 있던 논. 물먹는골샘
【우물】 대밭골 위에 있던 샘. 벌통바우골
【골】 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베틀바우[기암]
【바위】 세동 서남쪽 물가에 있던 바위. 모양이 베틀처럼 생겼음. 벼루들[연평]
【들】 비대 서쪽 벼랑 밑에 있던 들. 부이평
【들】 세동 서쪽에 있던 들. 불당골재1[불로티령, 불로티재]
【고개】 불로티에서 안천면 신괴리로 넘어가는 고개. 불당골재2[불로티재]
【산】 불로티 동남쪽에 있는 산. 불로티재가 있음. 불로치터널
【터널】 국도 30호선 상전면 세동리와 안천면 신괴리 사이에 있는 터널. 불로티
【마을】 구룡리의 가운데에 있던 마을. 전에 뒷산에 불당이 있어 코가 큰 부처가 있었다 함. 불로티령
【고개】 →불당골재1. 불로티방죽[구미제, 구룡지, 코크니방죽]
【못】 불로티 앞(남)쪽에 있던 방죽. 뒤에 불당이 있었고, 또 코가 큰 부처도 있었다 함. 불로티재1
【고개】 →불당골재1. 불로티재2
【산】 →불당골재2. 비대(鼻大)
【마을】 →코크니. 비대재(鼻大)
【고개】 →대양치. 뼘재
【고개】 베틀바우 뒤(동)쪽에 있던 고개. 산제당
【당】 구룡리에 있는 산제당. 정월 초에 산제를 올림. 서당날
【등】 세동 앞(남)쪽에 있는 등성이. 전에 서당이 있었음. 세동(細洞)
【행정리】 불로티 남서쪽에 있던 마을. 좁은 골짜기에 이루어졌음. 옛마을 부근에 새로 조성하여 세동이라 함. 세동길
【도로명】 구룡리 세동 마을길의 신 도로명. 소정이
【들】 →송정평. 솔정지
【마을】 세동 뒤(동남)쪽에 있던 나무. 둘레 세 아름. 송정평(松亭坪)[소정이]
【들】 불로티 앞(서)쪽에 있던 들. 전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음. 시목동(枾木洞)
【마을】 →감나뭇골. 싸리골
【골】 세동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싸리골산
【산】 세동 동남쪽에 있는 산. 높이 501.9m. 쌈장골
【골】 세동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양촌
【마을】 세동 북동쪽에 있던 마을. 어영골[오양골]
【골】 세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연평(硯坪)
【들】 →벼루들. 오리안배미
【논】 구룡리에 있던 논. 둥글고 오리처럼 생겼음. 오양골
【골】 →어영골. 오탑삼석(五塔三石)
【탑】 비대 앞 남쪽에 있던 탑. 용쏘
【소】 세동 앞(남)쪽에 있던 소. 용평대교(龍坪大橋)
【다리】 용평리 대구평과 구룡리를 잇는 용담호반도로. 길이 550m. 2000년에 놓임. 우화정(羽化亭)
【터】 불로티 남쪽 솔밭에 있던 정자 터. 윤두배미
【논】 불로티 서쪽, 구수배미 옆에 있던 논. 음촌
【마을】 세동 남서쪽에 있던 마을. 임만리묘(林萬里墓)
【묘】 비대 동쪽에 있던 묘. 자래바우
【바위】 집채바우 옆에 있던 바위.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음. 장군바우
【바위】 장군바우산에 있던 바위. 장군바우산
【산】 구룡리에 있는 산. 장군바우가 있음. 정자나무
【나무】 불로티에 있던 정자나무. 둘레 두 아름. 진무로(鎭茂路)
【도로명】 마령면 평지리에서 시작하여 진안읍과 상전면을 통과하여 안천면 백화리 밤골재까지 노선의 도로명. 국도 30호선에 속함. 집채바우
【바위】 베틀바우 밑에 있던 바위. 모양이 집채처럼 생겼음. 차독맥
【바위】 구룡리에 있던 바위. 차돌로 되었음. 코크니[비대, 금당, 증녀]
【마을】 불로티 북쪽에 있던 마을. 용담댐으로 수몰됨. 남쪽 가까이에 불당이 있었는데, 코가 큰 부처가 이곳에 있었다고 함. 코크니방죽
금당(金塘) : 금당의 행정리명. 용담댐으로 전 마을이 수몰되고 그 위에 새로운 마을이 조성되었다. 운암에서 금당으로 돌아오는 산은 그 모습이 코끼리와 같아 코끼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상리(象里)라 하였다. 코끼리가 코크니라고 음이 와전되더니 이를 한자로 적을 때 코가 크다는 뜻의 비대(鼻大)로 적어 이 이름이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름은 성적(性的)인 연상이 된다고 외부의 놀림을 받자 주민들은 이를 싫어해 왔다. 그래서 음을 취하여 비대(比大)라고 고쳤다가 마을 앞에 금당이라는 연못이 있어 금당(金塘)이라 부르기로 정하고 이를 요로에 청원하여 1992년 금당으로 고쳐졌다. 또 하나의 설은 마을 남쪽에 불당이 있었는데 코가 큰 부처가 이곳에 있었다고 해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한다. 이주한 마을에는 19세대, 28명(남15·여13)이 거주한다.(2023.9.30.현재)
【마을의 입지】 북동쪽에서 해모골의 물이 내려와 마을 옆으로 흘러 내려 용담호로 유입된다. 6시 방향 세동까지는 1.5km이다.
【입향조】 은진인 임경원(林璟源)은 불로치에 들어와 살았고, 진주인 강창룡(姜昌龍)은 회덕으로부터 비대리에 들어와 살았다.
【종교시설】 시온성교회가 있다.금당(金塘[비대, 코큰이]) : 용담댐으로 수몰된 마을.
【금당마을은 옛날에 상리(象里)의 지명을 가졌었다. 이러한 지명은 풍수지리적 마을 명이라 할 수 있다. 상리마을 뒷산의 산세와 바위가 마치 코끼리 코의 형상과 닮은 바위였는데, 이 바위가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다 코끼리가 음이 와전되어 코크니가 되었고, 그래서 상리마을은 속칭 비대(鼻大) 또는 코크니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풍수와 관련하여 삼석오탑(三石五塔)이란 이야기가 전해오는 마을이다. 현재 3석은 남아 있지만 돌로 조성된 5탑은 찾을 길이 없다.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금당마을 앞으로 펼쳐진 입석평(立石坪)에 3석 5탑이 있었다 한다. 3석은 금강 하류와 마을 사이 들에 횡렬로 위치하고 있었으며, 3입석 앞쪽에 5개의 돌탑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았다. 3석 5탑의 위치는 풍수지리상 조산 역할을 하는 입석·조탑 형태로서 이중적 비보장치라 할 수 있다. 3석 5탑이 위치한 곳은 지금도 숲이 일부 조성되어 있었지만, 옛날에는 무성한 숲거리였다. 현재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옛날에는 가운데 입석 근처에 수구막이 숲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3석 5탑은 수구막이 기능을 하는 입석과 돌탑이었던 것이다.
【민속】 날이 가물면 마을 남자들이 풍물을 치며 돼지를 몰고 형제봉 근처 도랑가에서 돼지를 잡고, 피를 바위에 뿌리고,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무제를 지냈다 한다. 한편 여자들은 키를 들고 마을 앞 금강 변으로 모여들어 건너 마을인 평은마을 여자들과 서로 키로 물을 퍼붓는 물싸움을 하고 목욕도 하면서 비 오기를 빌었다 한다. 추석 전후로 조벼를 베어 나락을 찧어 절구에 넣는다. 이때 찧은 쌀을 조상에게 바치기 위하여 조상단지의 쌀을 갈아 넣는다. 음력으로 10월 말경에 지붕을 새로 이고, 도신을 하여 선영을 잘 대접한다. 토정비결을 보아 그 해 운수가 나쁘게 나온 사람은 액막이로 오쟁이를 한다. 정월 보름에 짚으로 오쟁이섬을 만들어 그 안에 자갈을 집어넣고 3개를 연결하여 다리 형식으로 도랑가에 놓았다 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놓아 행인들이 밟도록 하였다. 마을에 염병이 돌면 마을 여자들이 이슥한 밤에 몰래 정천면 망화리 구마동의 디딜방아를 훔쳐와 동네 입구에 거꾸로 세워놓고, 왼새끼를 꼬아 묶어 놓고 여자의 아래 속곳을 입혔다고 한다. 유두날 아침 일찍 유두떡을 만들어 논의 물꼬에 갖다 놓기도 하고 유두할머니에게 바친다.
【수몰되기 전의 마을모습】 금당마을은 웃뜸과 아래뜸, 그리고 건너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건너뜸은 옛날 한지를 만들던 지소가 있어 지소뜸이라 하던 것을 건너뜸으로 고치게 되었다. 1690년 수원 백씨와 김해 김씨가 들어와 마을이 이루어 졌다고 하며, 수몰 전에는 진주 강씨, 김해 김씨, 창녕 조씨, 수원 백씨, 합천 태씨, 제주 고씨, 창녕 성씨, 진주 하씨, 죽산 안씨, 박씨, 한씨, 황씨, 허씨, 문씨, 염씨 등이 살았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음지골, 괘밭골을 지나 대항재가 있다. 재를 넘으면 안천면 신괴리 괴정마을에 이른다. 서쪽은 옛날 삼굿터인 솔밭을 지나 입석이 서 있는 길을 따라 나가면 남양강이 흐르는 쪽으로 운암마을의 주막뜸과 용평초등학교가 나온다. 또한 옛날 작은길로 오리목재를 넘으면 오리목 마을에 이르게 된다. 남쪽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입석, 교회, 불로치 방죽과 방앗간, 농협 창고를 지나 30번 국도에 다다른다. 북쪽은 마을 뒷산이다. 산을 넘으면 정천면 망화리 척금마을로 가는 옛날 소로가 있었다. 동쪽에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를 형제봉이라 한다. 예전에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이곳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술, 떡, 고기를 준비하여 제를 지내면 거짓말처럼 비가 내려 옷을 흠뻑 적시며 마을에 돌아왔다. 금당에는 오탑 삼석(五塔三石)이 있었다. 언제 누가 쌓고 세웠는지 알 수는 없다. 이들은 마을의 수구막이였으며, 동네의 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배치되었었다. 마을에서 보아 구렁들의 반에서 소나무 숲까지의 20미터 거리에 다섯 개의 누석단(돌탑)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농사짓는 데 거추장스럽다 하여 없애버려 흔적만 남아 있는데, 삼석은 수몰 전에도 서 있었다. 수몰 전 37세대 112명이 살았고, 농지 면적 48.6㏊, 임야 1,533㏊였다.
불로티(不老峙) : 용담댐으로 수몰된 마을.
불로티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 불노티는 1700년경에 낙안 김씨가, 1800년경에 진주 소씨가 들어왔다고 하며 한때 경주 이씨, 반남 박씨가 살다가 나갔으며, 수몰 전에는 진주 소씨와 낙안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원주 원씨, 나주 임씨와 죽산 안씨, 파평 윤씨, 정씨와 더불어 살았다.
【수몰되기 전의 마을모습】 마을에서 본 동쪽에는 불당골이 있고, 옛날부터 안천과 무주를 이어주는 도로 3개가 나 있는 뒷재, 대항재, 불로치 터널재 등이 있다. 서쪽으로는 황정산과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또한 1970년에 낸 농로를 건너 숲논들을 지나 금강 건너에는 평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평은 뒷산을 지나면 옛날 매받이를 하였다는 매봉이 우뚝 솟아 있다. 불로티가 정천면에 속해 있을 때 매봉으로 나 있던 길을 따라 정천면으로 다녔다. 남쪽은 앞들을 지나 동네골이라는 긴 산줄기가 마을 앞을 막아주고 있었다. 동네골재를 넘으면 세동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국도를 건너 검넌지라는 산이 우뚝 솟아 있다. 검넌지란 ‘험하고 높은 산’의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에는 금당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해모골 골짜기를 지나면 할미재가 나오는데, 옛날 이 재를 넘어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으로 이어지던 길이 있었다. 모정산은 동네 앞동산이다. 동네골산의 끝부분인 모정산은 오래된 소나무 숲으로 세동, 금당, 불로티 등 3개 마을에서 이곳에 모정을 짓고, 여름에는 삼동 주민이 휴식하며 놀던 동산이다. 모정은 헐렸지만 주민들의 피서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수몰 전에 17세대 57명이 살았으며, 경지 면적 19.7㏊에 임야는 153㏊였다.
세동
세동(細洞) : 세동의 행정리명. 수몰 이전 마을이 가늘게 형성되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용담댐으로 전 마을이 수몰되고 수몰 이주민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이다. 24세대, 31명(남13·여18)이 거주한다.(2023.9.30.현재)
【마을의 입지】 대덕산의 산줄기가 마을 뒤(동)를 두른 가운데 앞으로는 용담호가 펼쳐져 있다. 12시 방향 금당까지는 1.5km이고, 2시 방향 불로치터널을 넘어 괴목정까지는 3km, 9시 방향 용담대교를 건너 대구평까지는 1.8km 이다. 옛길로 1시 방향 임로를 따라 대양치 넘어 괴목정에 이르는 거리는 5km이다.
【유물산포지A·B】 마을에는 2곳의 유물 산포지가 있다. 한 곳은 마을 내 노인정 앞[A, 구룡리 649-3]에, 다른 하나는 세동마을에서 북쪽으로 1㎞ 지점에 있는 구룡리 호미동골[B, 구룡리 28]에 있다. 고려시대 토기 조각과 조선시대 기와 조각, 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세동2(細洞2) : 용담댐으로 수몰된 마을.
【마을유래·인구】 마을이 가늘게 형성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 1780년경 진주 소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죽산 안씨, 원주 원씨 등 3성바지의 집성촌이었고, 수몰 전에는 3성씨와 정씨, 이씨, 고씨, 최씨, 황씨, 표씨, 유씨 등이 살았다. 세동은 두 개의 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동쪽의 양지뜸과 남서쪽의 음지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뜸과 뜸 사이에는 앞들이 있어 동그란 밥상을 가운데에 놓고 정답게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입향조】 원주인 원광옥(元光玉)은 안산으로부터, 진주인 소선응(蘇善膺)은 익산으로부터 , 연안인 송국(宋國)은 장수로부터, 동래인 정석규(鄭石奎)는 안의로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